영화 " 또 하나의 약속 " 기대반 걱정반영화 " 또 하나의 약속 " 기대반 걱정반

Posted at 2014. 2. 4. 18:16 | Posted in BLOG/끄적끄적

 아직 개봉도 안한 영화에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많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모든 노등자들의 이야기이며, 그 노동자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는 세력을 나타냈다. 우리는 넥타이를 메고 출근해도 노동자이며, 막노동판에서 철근을 옮겨도 노동자이다. 우리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자의 이야기는 당연히 관심받아 마땅한 이야깃거리라고 생각한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에 대해 평 하는건 매우 조심스럽다. 새드엔딩이 예상되는 영화의 경우, 무작정 소비자의 눈물샘을 꽉 쥐고 미친듯이 짜내는 듯한 억지감동을 선사했던 상황도 한 두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단 실화를 기초로한 영화이다. 감독이 극화를 많이했다하더라도 기본적인 스토리보드는 그 실화에서 탄생한 시리나오가 주측일것이다. 만약 이 영화를 보면서 눈물샘이 누군가의 손아귀에 쥐어져있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아마도 비명하에 떠난 그 노동자의 손아귀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아마 90년대일것이다. 확실한건 아니다. 알아볼 필요성을 못느꼈으니까. 왜냐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업의 어떤 공장의 어떤 공정에서 일을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같이 치명적인 병에 걸린다. 라는 사실이 말이다. 우리는 영화에 몰입할 명분이 있다. 우리나라를 구성하는 약 90%는 이런 노동자의 신분이거나 자식이 노동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개중에는 임대업이다, 투자업이다해서 돈놀이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뺀다하여도 우리나라 대다수는 자기 몸으로 벌어 먹고살아야하는 노동자이다. 그리고 나 또한 노동자이다. 자신이 노동자임에도 '노동자'라는 단어에 알듯 모를듯 반감을 갖는 사람들도 있다. 하얀 와이셔츠에 멋스런 넥타이를 메고 승용차를 타고 출근하면 노동자가 아닐까? 완벽한 노동자이다. 다만 몸보다 머리를 더 쓸뿐이다. 


 우리나라는 자본주의사회이다. 민주주의보다는 자본주의에 더 가깝고 더 집착하는 형태이다. 민주주의 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체제다. 허울만 좋다. 실제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날은 5년에 한번 4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선거날 혹은 선거를 치루는 약 1~2달 사이이다. 그때만 국민은 주인이다. 그때만 높으신 양반들은 국민을 떠받들고 생전 가지 않는 시장에 가서 평소엔 냄새난다며 거들떠도 안보던 생선장수들과 꺼리낌없이 악수를 하며 머리를 조아린다. 그리고 당선이 되면 도시미화 라던지 환경오염의 이유를 들어 그런 재래시장을 엎어버린다. 억측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있는 일이다. 어쨋든 그런 허울 좋은 민주주의 며칠과 나머지를 메꾸는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 대부분의 노동자는 최하층을 담당한다. 



 진보적이며 대안적인 언론인 팟캐스트 방송들, 이이제이, 그것은알기싫다 등에서 다루면서 사람들에게 많이알려지며 개봉전 흥행에도 성공하는 듯 싶었던 이 영화는 그렇게 쉽게 성공 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회적 문제를 담은 영화들이 그랬듯이 이 영화도 상영관 문제가 있을 것이다. 오히려 기업을 직접적으로 사회에 고발함으로 같은 기업이 아니더라도 하나의 카르텔이 된 기업들이 운영하는 상영관에 이 영화가 올라가는게 더 부자연스럽긴하다. 혹자는 어차피 영화도 하나의 산업이니, 돈이 될만하면 다 상영해준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영화관주인이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돈을 번다는 의미에 있어 요즘은 이미지를 지키는것 또한 돈을 버는 의미가 된다. 일명 브랜드라고하지않는가. 이미지이다. 회사의 이미지를 한번에 깍을 수 있는 이런 영화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며 그냥 놔둘까? 난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런것을 놔둘정도로 착한 기업이 이런 영화로 구설수에 올라가는게 말이 안된다. 



 예고편만 보면서 이 영화의 코드를 몇가지 짚었다. 노동자에 대한 부당함. 자본의 폭력.등 바로 떠오르는 것 말고 이 영화의 본질적인 가치랄까.. 대중이 영화를 봄으로써 느낄 매력말이다. 내 생각에는 약자 혹은 을乙의 몸부림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은 노동자라고 정의했다. 노동자는 부호에게 부역하여 삶을 꾸려나간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거의 모두 을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의 모두 을인 것이다. 그 을이 갑에게 부당한 처사를 당하고 고통받고 탄압받고 억압받는 것을 본 사람들은 과연 슬퍼할까. 분노할까. 물론 영화가 잘 만들어졌어야 반응을 할것이다. 그 반응의 화살이 어디로 향할 지는 미지수이다. 싸워야 될 상대가 너무도 거대하면 일단 전의를 잃는게 다반사이며, 싸운다하여도 거대한 힘 앞에 자신의 작음을 더 처절히 느낄 뿐이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어떤 사람은 큰 기업이 망하면 한국이 망한다고 한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현 시대에 우리와 같이 살고있다. 오히려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깝지만 이 영화를 보며 눈물을 펑펑 쏟아낸대도 자기 자식이 이왕이면 이 회사에 취직했으면 하는 것 또한 사실 아닐까? 부당한 대우을 받고 억울하게 죽은 노동자는 정말로 불쌍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고, 부자고, 그래서 믿을만한? 회사의 제품을 우리는 사지 않을까? 같은 회사는 아니더라도 같은 생산직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그 회사의 스마트폰을 구입하진 않을까? 이 영화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은하계의 영롱함을 닮은 전화기로 우리는 커뮤니케이션하지 않을까? 물론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그래선 안된다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태어난 이상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누구도 억울하게 죽을 이유는 없다. 그것이 돈 없고 배운 것 없는 일개 노동자라 해도 말이다. 누구도 그렇게 죽게 할 권리는 없다. 사업주는 노동자로 인해 잉여 가치를 얻어 자신의 부를 늘린다면, 최소한 일하면서 병이 생길만한 요소는 모두 없애야한다. 적어도 일하다가 죽었으면 설령 자신의 과오가 아니더라도 최대한 노동자의 측면에서 헤아려야한다. 어차피 우리나라 재벌들도 사람이고, 한 사람의 힘으로 그 부를 유지, 확장할 순 없기 때문이다. 그 넓고 좋은 기구가 많은 에버놀이동산을 회장 혼자서 조작하고 청소하고 관리할 수 있을까? 어차피 노동자가 있기에 돌아가는 것이다. 



영화 ' 또 하나의 약속 ' 의 장르는 공포물이다. 사람이 죽어서 공포물이 아니다. 바로 현실에서 죽임을 당했던 가족이 생존하고 있으며, 그 죽임을 행한 사업체 또한 버젓이 운영되고있으며,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그 업체를 매우 신뢰한다는 것. 바로 그 점 자체가 공포다. 역지사지해보면 간단하다. 내 아이가 어떤 업체의 부주의 혹은 과실로 인해 죽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 어느하나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업체의 자금력과 실력을 담보로 그 회사 제품을 더 사주고 환호해준다. 당신의 기분은 어떨까? 난 절망스러울 것 같다. 그래서 공포다. 이 영화가 개봉하는데에 많은 상영관이 반대를 한다. 그래서 공포다. 그 반대하는 상영관에 "겨울왕국" 이나 더 해줘요. 라고 하는 언제나 행복한 사람들이 인구대비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라서. 그 나라가 내가 사는 나라라서 .. 그래서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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