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기획 창 - 대한민국 안전점검 보고서, 세월호 사건에 대한 개선시사 기획 창 - 대한민국 안전점검 보고서, 세월호 사건에 대한 개선

Posted at 2014. 4. 30. 21:54 | Posted in 리뷰/TV

 세월호 참사는 과연 막을 수 있는 인재였을까? 결과적으로 막지 못했을 뿐 미리 알고 있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냉소 어린 미소만 지어지는 것은 내가 극히 부정적인 인간이라서 일 수도 있다. 


 시간을 되돌려 세월호가 출항하기 전에 소리 높여 그들의 출항을 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경찰이 난동부리는 시간 여행자를 잡아가고 이미 교사가 인솔하는 학생들은 '웃기는 아저씨네.'라며 배를 탈 것이다. 출항을 저지하는 것이 아닌 '너희 배 사고 나면 구명조끼 입고 꼭 갑판으로 나와!'라는 조언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한 명이라도 살아 돌아올 수 있다면 분명 의미 있는 시간 여행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시간 여행자가 주식투자나 로또나 토토를 이용하지 않고 오직 아이들과 승객들을 위해 세월호가 있던 인천항으로 뛰어갈지도 의문이긴 하다. 


 시사 기획 창은 이런 후회보다는 이번 사고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의 안전 생태를 조명했다. 나름대로 이득이 있는 방송이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세월호 침몰의 전모를 다시 내보낸 것을 빼면 볼만했다. 애도와 추모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엄벌과 개선도 필요하다. 그런데 사고의 진행에 대해 새로운 소식이 아닌, 있는 사실을 또 다르게 포장해서 내보내는 것은 심하게 물렸다. 그냥 방송 후반에 내보낸 '그래서 사고 후 어떻게 되고 있나?'의 내용만으로 채웠으면 정말 괜찮았을 것 같다. 







 오프닝이 매우 인상적이다. 지난 마우나 리조트 붕괴 사건 당시 총리가 읊은 안전 대한민국에 관한 각오를 말하는 영상은 정말 많은 감정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기본 책무이며 붕괴사고를 계기로 안전 문제를 근본부터 바로 잡는다고 말하는 저 사람이 진심인지 아니면 그저 허풍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기본 책무라고 하는 총리의 말을 인용하면 지금의 한국 정부는 기본 책무도 못하는 것이 된다. 회사에서 기본 책무를 못하면 잘린다. 학교에서 기본 책무를 못하면 맞는다. 군대에서 기본 책무를 못하면 패배한다. 그러면 국가가 기본 책무를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책무 또는 의무라고 말할 수 있고, 그 의무가 정부의 존재의의이다. 고객인 국민이라는 사람들은 국가에 A/S를 신청해야 한다. 하다못해 과자 하나 사서 포장이 뜯겨있으면 바꾸러 가는 사람들이 왜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지도 못하는 국가에는 침묵하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다. 


 '난 침묵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한 손에는 쓰다 남은 듯한 촛농이 맺혀있는 양초를 증거로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말해 그것이 침묵하는 거랑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 촛불은 추모의 도구로써 추모제에 정말 어울린다. 영롱한 불빛이 여기저기 어둠을 밝히며, 같이 노래하고 구호를 외친다. 마음이 하나로 뭉치며 따뜻하고 뭔가 해낸 듯한 기분마저 든다. 그래서 추모로써 어울린다. 하지만 국민의 목소리를 전하기에 촛불은 그 힘이 없다. 촛불이 힘을 얻으려면 언론이 정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언론은 예능과 스포츠와 광고와 수신료를 위해 존재하지 않던가? 그래서 결국 촛불은 그들만의 리그가 돼버린다. 그들이 어떻게 슬픔을 표출하고 어떤 식으로 자위하든 많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침묵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고 하던 촛불집회 막으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그리고 그 씁쓸한 결과를 직접 느껴봤으면 한다. 결코, 그걸로는 씨도 안 먹힌다는 것을.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 넌 무엇을 하는데?'라며 빠른 솔루션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컵라면도 아니고 그렇게 몇 마디로 정리해서 나올 결과이면 애초에 이렇게 되지도 않았다. 게다가 누군가 '이렇게 하면 됩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 말을 듣기나 하려나? 결국, 너무 폭력적이라느니, 다음 날 출근이 걱정된다느니, 그건 너무 심한 거 아니냐느니라는 말로 순식간에 흩어져버린다. 마치 먹을 것을 보고 달려들던 벌레가 환한 빛을 보면 샤샤삭 흩어지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화물 운송업체 종사자와의 인터뷰는 문제의 근원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결국, 돈이었다. 그 돈이 얼마만큼인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과연 꽃다운 인생들을 수장시켜야 할 정도로 크고 값진 것이었을까? 일반적인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교과서적인 답을 할 것이다. 나 역시도 그렇다. '인간의 생명보다 돈이 중요하다.'라는 자본주의 아니 금권주의 사회에 살면서도 우리는 간지러운 이런 말에는 수긍한다. 실제로 인간의 목숨값은 서울의 빌딩 숲 안에도 찾아볼 수 있다. 'XX생명', 'XX보험'에 가서 '내가 죽으면 얼마를 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자. 그들이 '선생님의 생명은 돈보다 소중합니다.'라고 할까? '어떤 상품 알려드릴까요?'라고 할까? 그렇다고 그런 보험사와 보험설계사들이 생명 존엄도 없는 나쁜 사람들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 사회는 돈으로 생명을 잴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돈 때문에 사람이 죽는 것이 자의든 타의든 우리 사회에서는 놀랄 일도 아니다. 


 '돈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 이 말이 어색하지 않은 우리 사회이기에 화물을 1,500톤 더 실으면 돈이 많이 남으며, 그래서 그런 사단이 일어났다는 데에 별로 이해 못 할 말은 아니다. 그런 이해 능력이 바로 우리 사회의 인식이다. 너무 슬퍼서 참혹하기까지 한 참사가 결국은 돈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미운 돈을 모두 버리고, 다시는 쓰지도 벌지도 말자는 말은 없다. 모두 자본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며, 문명에선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증축과 과적에 인한 평형수의 부재 그리고 계약직의 선장도 밉지만, 그 이면은 결국 모두 돈 때문이다.


 진짜 웃긴 것은 결국 많은 애도 속에서 가장 빛을 바라는 것 또한 돈이라는 것이다. 진심으로 마음이 아프며,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누가 얼마를 기부했는지, 어떻게 기부했는지가 더 추모의 크기를 상징하며, 뉴스가 된다. 돈 때문에 죽은 아이들에게 다시 돈으로 추모하는 사회가 정상일까? 그 추모를 뉴스로 만들어 파는 언론이 정상일까? 그 기부가 마음이며, 기부자를 착하게 보는 사람들이 정상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그 돈이 꼭 필요한 곳에서 쓰이는 게 나쁜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말도 맞다. 다만, 그 돈이 불현듯 나타난 정체 미상의 재단으로 들어가는 대신 피해자 가족들에게 들어간다면 말이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무자본주의라거나 인본주의자라는 건 아니다. 나 또한 철저한 자본주의자를 넘어 물질만능주의자이다. 돈으로 못 하는 것은 없으며, 그 돈을 벌기 위해 이런 사고가 나는 것은 슬프나, 또 같은 사고가 날 것 같은 돈벌이에는 오히려 기대할 것이다. 나만 그럴까? 아닐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각계각층의 변화와 개선의 목소리들이 들린다. 의미도 없고 이유도 없지만 일단 잘못된 것에 대한 변형의 의지는 나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로 바뀔까? 개인적으로 이 생각은 생각으로 그칠 것이며, 월드컵을 기점으로 소멸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며, 희생자들을 봐서라도 한국은 바뀔 거로 생각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 듯하다. 


 이번 시사 기획 창의 방송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 아닐까 싶다. 배의 표를 사는데 아무런 개인정보의 물음이 없었다. 물론 배표 아래에는 개인정보를 써 놓아야 했지만 강제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거 쓴다고 해서 검표원이 그 정보가 적힌 표를 하나하나 체크해서 기재할지도 의문이었다. 방송의 내용만 보자면 카메라를 들키기 전에 검표원은 표를 그냥 받았다. 하지만 카메라가 나타나자 신분증 대조를 시작했다. 즉, 그냥 표를 받는 게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 그랬다고 볼 수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주일이 지났다. 일반 시민보다 같은 업계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더 느끼는 것이 많았어야 할 사람마저 이렇다. 바로 이 부분이 많은 실종자 중 일반인 실종자들은 누가 탔는지도 모르는 무능한 정보력의 시초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외항선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국내 여객선의 경우, 아예 발길을 들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된다. 언제 어디서 사고를 당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사고를 당하면 그 배에 내가 타고 있는지조차 모를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구조를 기다리기엔 선사와 계약된 업체가 올 때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냥 아예 배라는 것을 안 타는 게 좋은 것 같다.



 배에 실은 차를 고박하는 줄이 매우 깨끗하다. 즉 근래에 새로 샀다는 증거이다. 물론 원래 쓰던 줄이 헐어서 새로 장만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닐 수도 있다. 






 제일 경계해야 할 안내 방송이 나온다. 평상시에는 그냥 들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위급 시에는 절대로 듣지 말자. 스스로 배의 안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자신의 구명조끼를 챙기며 항상 탈출로를 익혀두는 게 좋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로 슬픔을 느끼는 것 말고, 배운 것은 무엇인가? 나의 경우 절대로 국내 여객선을 타면 안 되겠다는 것과 만약 타게 되더라도 스스로 살 궁리를 하자는 것이다. 물론 모든 여객선의 승무원들을 일반화시켜 세월호 승무원과 같은 인면수심의 사람들로 보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그래서 이런 것을 개인의 선택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구명보트의 점검을 묻는 말에 잘 모르겠다는 답변을 한 직원을 보며 제2의 세월호는 언제든지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오늘 출항 전에 점검했는데 저 직원만 모를 수도 있고, 대답하기 귀찮아하는 직원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아닐 수도 있다.




 일명 램프라고 불리는 것으로 탈출한다고 직원이 말했나 보다. 그 말이 효용성이 있는지 정말 그래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진짜 신경 쓰이는 것은 뒷말이었다. '저희 배에 왜 와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란 말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아직 사고는 안 났으니 이럴 필요 없다는 말 같이 들리기도 했다. '우리 집에 왜 왔니~왜 왔니~왜 왔니~?' 



 도선사이며 인천항 발전협의회장인 이귀복 씨가 말하길 배가 운항 중일 때 침몰 중이더라도 램프를 열면 물이 들어오며 그건 큰 잘못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큰 잘못을 탈출의 경로로 알려준 승무원도 잘못일 것이다. 이는 승무원에 관한 안전 교육이 전혀 안 이뤄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바다의 안전은 해양경찰이' 라고 쓰인 것을 보며, 왜 뒷말은 없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122로 신고하는 캠페인 같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저 시스템을 위해 약 40억 원이 쓰였다고 하는데, 그 돈의 출처는 당연히 세금일 것인데도 사람들이 쓸 줄을 모른다면 무용지물임은 확실하다. 실제로 122에 한 해 몇 건이나 도움 요청이 오는지 취재했다면 어땠을까? 






 시사 기획 창 - 대한민국 안전 보고서 편을 보면서 결국 한국의 안전은 없다는 생각을 다시금 했다. 재난으로 죽어 간 생명에 많은 애도를 하며, 슬픔의 감정을 발산하는 것은 결국 감정의 표현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돼버린 듯하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 엄벌은 이루어질 듯하다. 하지만 엄벌은 당연하고, 제일 필요한 것은 개선 아닐까? 그러나 사고에 대한 철저한 개선은 적어도 이 방송에서 보이지 않았다. 물론 아직 세월호의 모든 실종자 구출이 이루어지지 않은 뒤숭숭한 상태여서 일수도 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중에도 다른 여객선들은 운항 중이지 않은가? 


 개선이 없으면 개선하게 하던가, 떠나던가 선택은 2가지뿐일 것이다. 그리고 개선하게 하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약 100배 쉽다. 대한항공의 주식을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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