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는 법, 대한민국은 행복한가 - KBS 스폐셜행복해지는 법, 대한민국은 행복한가 - KBS 스폐셜

Posted at 2014. 4. 7. 22:09 | Posted in 리뷰/TV

 행복이란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어 만족하거나 즐거움을 느끼는 상태 혹은 불안함을 느끼지 않고 안정된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딱 집어 '이것이 행복이다!'라고 정의하지 못하는 것은 행복이 그렇게 희귀한 것이 아닌 어느 곳이나 어떤 일에서나 파생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KBS에서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 스폐셜로 다큐를 제작했다. 이 방송에 대한 예고를 보면서 강렬히 드는 예감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교육과 경쟁체제 그리고 불안한 노후가 나올 것이며, 그에 대한 해결책보다는 스칸디나비아 3국 같은 복지가 잘 되어 있고 노후의 불안함이 없는 곳의 상황을 보여주며, 이런 나라도 있으니 우리도 저렇게 해보자. 라는 식의 달래기로 마무리할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그리고 거의 적중했다. 



 대한민국은 행복한가? 이 물음에 나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과연 행복할까? 라는 질문에 일언지하 반문도 없이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많은 통계와 자료와 사건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것보다 단순하게 즐거움보다는 실리를 쫓고, 자아실현의 욕구보다는 자아 수익에 휩쓸려야 하는 사회이기에 그렇다. 


 대한민국은 행복하지 않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비율적으로 불행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나라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살며, 그 삶 속에 경제적 불안함이나, 노후에 대한 불안정이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광활한 벌판에 연필과 노트를 들고 오직 행복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명문대 입시를 향해 돌진하는 것이 요즘 학생들의 모습일 것이다. 자신의 꿈이나 욕망보다는 오직 좋은 대학을 가기 원한다. 그 이유는 좋은 대학을 가야 좋은 직장에 가고 좋은 직장에 가야 좋은 임금을 받고, 좋은 임금을 받아야 안정된 가족생활과 노후를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중학교 때부터 우리는 늙어 죽기 전의 밥걱정을 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 학생들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쟁에서 뒤떨어지면 사회적으로 저소득층이 되는 건 불 보듯 뻔하며, 저소득층이 되면서 느끼는 불안함과 자괴감은 대한민국의 고질적이고 대중적인 불행이다. 그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학교에서 늦은 시간 공부를 하며, 끝나고 다시 학원으로 가는 발걸음에 대해 '그런 식으로 청춘을 보내면 불행하지 않아?'라고 훈수 두는 것은 얼마나 염치없는 짓인가?




 대한민국에서 대학을 안 가면 사회에서 아무도 인정을 안 해준다는 학생의 말에 몇이나 반대를 할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기에 더 씁쓸하다. 학교는 대학 입시공장이다. 옴짝달싹 못 할 정도의 닭장에 온종일 빛을 보지 못한 닭과 같다. 알을 많이 낳기 위해 항생제를 먹이는 것과 같이 좋은 수익을 위해 많은 지식을 주입한다. 행복해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행복하지 못한 닭보다 적응을 못 하거나 알을 별로 낳지 못하는 닭이 더 불행하다. 그 닭은 어떻게 될까? 또 그런 학생은 어떻게 될까? 




 태어난 것을 잘못으로 생각하게 하는 나라의 존재의의는 무엇일까? 학생들의 스트레스와 많은 가능성을 포기하고 획일화된 교육은 그만큼 한국의 가능성을 깎아먹는 짓이다. 분명 저 학생들 안에는 제2의 스티브잡스와 같은 혁신적이고 창의력 있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동사무소에는 죽어버린 스티브잡스가 몇 명이나 근무하고 있을까?



 경쟁의 압박에 견디지 못한 많은 학생은 학업을 중단한다. 그리고 그들은 사회의 낙오자가 된다. 09년 한해 34000명의 학생이 학업을 중단했다. 분명히 이 수치는 증가추세일 것이다. 게다가 자살한 초중고생이 202명이라고 한다. 물론 학업과는 별개의 문제로 죽은 학생도 있겠지만, 이런 경쟁체제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문득 예전 어떤 학생의 유서가 생각난다. 부모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성적표에 "이제 됐죠?"라고 써놓고 투신한 그 학생에게 행복이란 무엇이었을까? 그 학생은 아마 좋은 점수나 대학보다 부모의 칭찬과 소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에 트렌드에 맞춰 아이의 진학만을 생각하는 부모는 결국 자식의 생명을 앗아간 주원인이 돼버린다. 


 "공부해! 공부!"라고 닦달하는 부모들이 잘못된 것일까? 꼭 그렇지도 않다. '남들 다하는데, 우리 아이만 뒤떨어지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남들 하는 건 다 해야 하고, 나아가, 남들 보다 잘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는 한국인 아닌가? 하지만 그 도구가 아이라는 점에서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된 한국이란 나라는 하나의 거대한 도살장과 같다. 부모의 마음에 들게끔 혹은 절대적 점수에 맞게끔 많은 학생의 인권과 가능성은 오늘도 철저하게 도륙당하고 있다.







 어떤 학원의 원장이 말하는 게 굉장히 불편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확한 현실을 말한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성공이라는 것에 닿기 위해선 일단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것, 가는 대학에 따라 평생의 소득이나 생활 수준이 달라진다는 것, 맞는 말이다. 


 성공하기 위해선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 그래서 좋은 대학에 가서 성공하면 행복해질까? 성공과 행복은 동의어가 아니다. 성공해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행복한 사람도 성공을 못 한 경우가 있다. 그러니까 한국 교육의 거대한 한 축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저렇게 말하는 것은 결국 학생의 행복보다는 돈을 많이 벌게하는 것, 그것이 교육의 목적이라는 것과 같다.  


 돈만 많으면 행복해지는 걸까? 물질주의자, 배금주의자라고 생각해도 좋은 나는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 하지만 결국 그 돈이 많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그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음에 좋은 것이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다. 한국과 같은 천민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나라에서는 특히나 더 그렇다. 하지만 일단 그 돈을 벌기 위해 쓰이는 시간과 노력에서 우리는 많은 행복을 담보로 매긴다. 결국, 돈을 왕창 벌어서 행복을 살려고 둘러보면 손에 있는 종이 말고는 어떤 것도 그 담보들을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교육의 끝은 무엇일까? 적어도 한국 공교육의 끝은 수능이다. 그래서 수능시험장 앞에는 언제나 부모들의 기도가 충만하다. 기도로 될 거였으면 그렇게 오랜 시간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렇듯 온갖 헛짓을 해서까지 자식의 고득점을 기원한다. 저 행위에 관한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자식의 탄탄대로일까? 아니면 자식으로 하여금 자신의 노후를 윤택하려 하게 함인가? 그것도 아니면 남들이나 친척에게 자랑하고 싶어서일까?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나님, 부처님, 조상님 부디 우리 새끼는 서울대 가게 해주세요."라는 기도가 공허한 것은 자식의 웃음보다 자식이 더 좋은 돈 버는 기계가 돼달라고 비는 것처럼 보여서일까?


 돈 버는 예비 기계들의 조용한 비명은 부모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학생들이 원하는 명문대에 들어갈 확률은 1.4%라고 한다. 백 명 중 1.4명 즉 2명이 될까 말까 한 그런 확률에선 당연히 경쟁이 심할 수밖에 없다. 너도나도 가고 싶은 대학이 있고, 그래서 교육은 그들의 지식을 양성하기보다는 지식을 가지고 전쟁을 치르게 하여 승리자에게 그 기회를 준다. 



 현저하게 낮은 주관적 행복도는 말라비틀어진 우리 학생들의 만족감을 나타낸다. 사회는 그렇게 생기가 없더라도 더 나은 점수를 가진 학생을 원하는 것이다. '행복해서 뭐 하는데? 돈만 잘 벌면 되지.'라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만, 이미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학생이 그나마 행복한 시간은 친구들과 어울리고, 게임하는 것인데 어른들은 그것을 악으로 규정했다. 4대 중독법 중에 게임이 들어가며 대대적인 게임 업계 규제를 함에 많은 네티즌이 말도 안 된다며 항변했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법안이 힘을 얻는 건 학부모들이 그를 지지하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모바일이나 컴퓨터로 하는 게임이다. 즉 어른들의 게임인 유흥이나 성매매, 고스톱이나 포커같은 도박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저 어떤 식으로든 공부하고 상관없는 것을 하면 그것이 아무리 행복한 것이어도 꼴보기 싫은 것이다. 



 심심치 않게 터지는 청소년의 자살 소식은 결국 그런 과도한 경쟁과 학부모와 사회의 압박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 아닐까? 사람이 죽는 게 자연스러워질 정도의 사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아주 미개한 사회일 것이다. 돈은 잘 벌지만 미개한 돼지우리 같은 나라라고 생각할 수 있다. 


 '먹을 것, 입을 것 없어서 많이 굶주렷는데, 요즘 세대는 그것 몰라, 고생 좀 해봐야 해.' 라며 공부 안 하는 학생에게 핀잔을 주는 어르신네들이 있다. 아직도 5~60년대의 생각으로 아이을 대하는 부모 또한 차고 넘친다. 불우했던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지금은 아주 좋아진 것이라며, 아이가 죽을 정도로 힘든 것은 둘째치고 밥 주고 옷 주면 행복할 거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모든 부모가 그렇진 않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부모의 연령도 낮아진다. 그래서 생존에 빗대어 아이를 구박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 부모들도 결국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 아이를 혹사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정확히는 더 나은 돈 버는 기계가 되길 원한다. 편하게 해외여행도 못 가고, 명품도 몇 개 없을뿐더러 자동차도 한 개고, 집도 전세 여서, 그래서 만족 못 하는 자신이 행복하지 못하기에 자식은 더욱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완전 공부 기계가 되어 미쳐있는 학생과 그를 보필하는 부모도 죽을 맛이란다. 당연한 거지만, 결국 이 악순환의 굴레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저렇게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는 사람부터 교육제도를 바꾸자거나, 사교육을 철폐하자거나 라고 하면 엄청난 반발을 하기 때문이다. 마치 다 썩어가는 이빨을 치료하자고 치과에 가자면 미친 듯이 울고 불며 떼를 쓰는 아이와 같다.


 '낙오자 없고 누구나 만족하고 행복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교육제도를 바꿉시다. 일단은 대학의 서열화를 개선합시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를 없앱시다.' 라고 하면 학생들의 행복이나 낙오자 같은 건 둘째치고 왜 우리 아들부터 그러냐며 서울대를 없애면 마치 자신의 아들이 갈 대학을 없애버리거나, 자신의 아들이 차지할 명예와 훈장을 가로챈다는 듯 반응할 것이다. 그러니까 참 멍청한 것 같기도 하고 약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사교육비가 한 명당 초중고 때 1억 원이 든다고 한다. 이렇게 좋은 수요가 있는데 당연히 사교육 시장이 성장 않으려야 안 할 수가 있을까? 성장한 사교육은 더욱 가열차게 학생들을 모으고 교육할 것이다. 


 공교육만으로 부족한 이유는 모두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떨어져야 하고 누군가는 투신해야 하며 누군가는 돈 잘 버는 기계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생은 돈 버는 기계이다. 그렇기에 그 준비를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학생이란 존재는 오직 그 용도 때문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학교와 학원에서 보낸다. 오직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공무원이나 의사가 되길 원한다. 그리고 행복이란 굳이 영위하지 않아도 될 감정이 된다. 


 학생들이 느낄 행복이란, 원하던 대학에 붙었을 때 약 3~4일 정도 울컥할 감동과 보람이 다일 것이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과 자신의 자아와 꿈으로 이루어지는 많은 행복은 결국 다른 나라 이야기이다. 



 웃긴 건 그렇게 명문대에 들어가더라도 결국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입시지옥을 거치면 입사 지옥을 경험해야 한다. 겨우 8천 명 모집하는 회사에 46만 명이 지원을 한다. 회사 입장에선 좋은 인재 가려 뽑을 수 있어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낙오자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어찌어찌 겨우 입사하더라도 노후 준비하랴 아이들 똑같은 돈 버는 기계로 만들랴 하다 보면 늙어서 명예퇴직이 기다린다. 퇴직을 피할 수 있는 임원이 되는 비율은 채 1%도 되지 않는다.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이 송두리째 행복하고는 상관없는 경쟁에 놓인 삭막한 인생이 돼버린다. 우리 사회는 그런 삭막한 인생을 두고 평범하다거나 다른 낙오자들과는 다른 성공한 인생이라고 일컫는다. 결국, 정치인들이 캐치프라이즈로 "사람답게"나 "행복"이란 키워드가 매우 잘 먹히는 것도 이런 것 때문 아닐까? 





 우리 사회는 획일화되어 있다. 어떤 게 좋은 직업인지 순위가 있고, 어떤 대학이 좋은 대학인지 순위가 있다. 그래서 그 순위에 맞게 자신을 맞추려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당연히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줄에서 이탈한 수많은 낙오자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수능 고득점의 정점을 찍은 사람들이 가는 의대, 그리고 거기에서 생존하는 의사들 또한 절반 이상이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 




 결국, 의사라는 직업도 적성에 맞는 사람이나 의사가 꿈인 사람이 해야 바른 것인데, 그저 점수가 높아 부모나 주위에서 원하는대로 의사가 된 사람이 절반 이상이라는 소리이다. 


 꿈과 적성보다는 점수로 직업이 결정되는 한국에선 이게 당연하다. '니가 뭘 원하든 선택하기보다 선택 당해야 되는 세상'이 한국이다. 



 지금까지 쭉 서열화와 순위화에서 오는 경쟁에 치부를 드러내는 이런 다큐에서 조차 순위를 사용한다. 통계에 의한 순위로 심각성과 경각심을 주는 데 있어 이런 방법이 효과적인 이유는 결국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은 순위에 민감하다는 방증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문제에 대한 원인은 역시 돈이다. 한국에 기독교 교회가 아무리 많이 생긴다 하여도 결국 최고의 종교는 돈이다. 돈이 사람을 움직이고 죽이고 살릴 수 있다. 그래서 아이 어른 할 거 없이 모두 행복을 팔아 돈을 번다. 




 확실히 말해 돈은 우리에게 행복을 준다. 돈만 봐도 행복한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죽기 전에 돈방석에서 죽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돈만 준다는 자신의 장기를 팔거나,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자식을 팔기도 한다. 돈만 준다면 아마 대한민국을 통째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행복이 무슨 소용인가? 입으로 밀어 넣을 밥과 무엇이든 살 수 있도록 구비되어 있는 지갑의 종이가 더 중요하다. 아이들과 단란하고 웃고 즐기는 일상의 행복보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깨지며 일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다. 남을 돕거나 봉사하는 것은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가? 차라리 그 시간에 구슬이라도 꿰서 살림에 보태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한국은 생각한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원하는 플랜 대로 살며 성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렇게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자신이 부족해서, 더 노력을 안 해서 2등 밖에 못했다며 자책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낙오자가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렇게 낙오자는 매정하게 떨어지는 이 시스템이 있는 나라가 왜 한 번도 과학 인문분야에서 노벨상은 못 받는 것일까? 


 경쟁은 결국 루저를 만들고 승리자에게 공허한 기쁨만이 준다. 그리고 그들을 경쟁에 중독시켜 행복을 앗아가는 매우 안 좋은 체제이다. 




 외국의 박사가 결국 부패하지 않고 신뢰받는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 난 왜 그 말이 그렇게 참혹하게 절망스럽게 들렸을까?..


 누구나 행복하길 원한다. 하지만 행복한 사람이 별로 없다. 행복해지는 길로 나아가는 데 용기가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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