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좋아하는 수족관의 돌고래를 보며 느낀 오싹함하루가 좋아하는 수족관의 돌고래를 보며 느낀 오싹함

Posted at 2014. 4. 1. 15:19 | Posted in 리뷰/TV

 "아 제발! 쫌! 엔간히." 란 생각을 스스로 할 정도로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문제들을 혼자 끙끙거리는 것이 싫어진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기를 강제적으로 쓰게 하고 거기에 검사까지 하는 비인권적인 행위를 당할 때 나는 극렬하게 저항했다. 그건 결국 교권에 대한 을의 도전이었고, 그 '을'을 관리하는 학부모와 선생이라는 관리자에 의해 처참할 정도로 짓이겨졌다. 다른 친구들이 하는 것처럼 거짓으로 그들의 맘에 들게끔 써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론 여전히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행위라고 생각했다. 인권침해는 침해며, 난 강제로 일기라는 것을 쓰는 것이 나쁜 짓이라고 느꼈다.


 1일의 무게가 있는 나의 인생의 감상을 쓰는 데 있어 그것이 문장력 개발이라든지, 창의성 창출 같은 여타 능력 개발의 도구로써 쓰이며, 너의 생존을 책임지고 있는 부모가 원하기도 하니까, 강제적으로 일기를 쓸 때와 같은 압박이 슈퍼맨이 돌와왔다를 보며 다시 한 번 느꼈다. 



 나는 동물 애호가도 아니고, 환경 운동가나 보호가도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 동물은 냄새나고, 더러우며,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해서 애완동물을 키우기를 반대한다. 물론 그냥 잘 지내는 동물을 가져다 던진다거나 폭력을 행사한다거나 하진 않는다. 그 애완동물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소 닭 돼지 같은 일반적인 동물의 경우, 그들을 먹는 것도 즐긴다. 그러니까 아주 평범하게 동물을 대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슈퍼맨이 돌와왔다에서 수족관에 갔다. 물고기를 좋아하는 하루가 신 난 건 당연했다. 그리고 돌고래와 수영장에서 직접 노는 모습도 보였다. 별다른 감흥 없이 보고 있던 나의 결벽증을 깨운 한마디가 나온다. "돌고래는 친구야." 


 돌고래는 분명히 인간을 잘 따른다고 알고 있다. 해양 조난 물에선 망망대해를 떠도는 사람에게 한 줄기 희망의 메타를 선사하는 것 또한 돌고래의 "끼익~" 소리와 특유의 재롱인 점프일 정도다. 하지만 돌고래가 진짜 인간의 친구일까? 동물 중에선 지능도 높고, 귀엽고, 포유류이며, 사람을 잘 따른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을 친구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 돌고래라는 생물군에 있어 인간은 약탈자 혹은 착취자, 납치자 정도밖에 되지 못한다. 


 친구라는 말 대신 아주 솔직하게, "하루야, 이 돌고래는 멀리 바다에서 억지로 잡아 온 생물이야. 맘대로 납치해서 돈 버는 용으로 쓰기에 알맞아. 너도 한번 쓰다듬어 보렴." 이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결국, 귀여운 돌고래를 가지고 노는 모습과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으로 포장함으로 우리는 돌고래의 입장보다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즐기면 되는지만 보며,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똑같이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물로써 그렇게 교육받는 것은 아닐까?


 생김새가 틀리고, 인간이 아니라서 마음대로 이용해도 되고, 자신의 말을 들어야 하며, 갇혀 있는 것이 당연하며, 그 상황에서 자신에게 어쩔 수 없는 복종의 결과들이 "친구"라는 단어로 표출된다고 믿게끔 하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인지,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며, 신경 써봤자 변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마치 지워지다가 만 분필 자국처럼 계속 신경이 쓰였다. 


   

 얼마 전 이슈가 됐던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바로 1950년대 벨기에 동물원의 사진이다. 거기엔 아프리카에서 잡아 온 흑인 소녀가 갇혀있었다. 그 소녀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물의 취급을 받았다. 많은 사람의 관심을 일으키며 우리 안에서 음식을 받아먹고 온 종일 시선을 느꼈을 것이다. 소녀가 납치당해 갇힌 이유는 다르다는 이유 하나다. 그래서 가족을 잃고, 인권을 유린당한 것이다.


 저 소녀와 돌고래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물학적으로 다른 구조를 가진 다른 생물이라는 것을 빼면 결국, 인간에게 납치당해 쇼의 도구로 금전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훈련된 도구 아닌가? 그런 도구를 아이가 물어본다고 해서 "친구"라고 대답하는 것은 충분히 오싹함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예를 들어 저 벨기에 동물원에서 어떤 부모가 아이에게 "흑인이라는 동물이란다. 한번 만져보렴. 우리의 친구야." 라고 했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오싹함을 느끼는 것이 그렇게 이해 못할 감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돌고래와 비롯한 다른 동물들을 가둔 동물원이나 수족관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지, 아니면 지구의 암 덩이인지 확실히 정의는 못 하겠지만, 지구에 있는 모든 생물 중에 가장 과학적으로 성공한 동물이다. 약육강식이라는 정글의 법칙을 따르더라도 인간이 자신보다 저능하고 약한 동물을 데려다 쇼를 시키든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든 살코기를 벗겨 음식을 해먹든 뼈를 고아 먹든 그것 또한 자연의 법칙 중 하나일 수도 있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오싹하다고 느낀 것은 바로 그런 존재를 "친구"라고 말하며 웃을 수 있는 그 파렴치함 때문이다. 그 파렴치함은 아이에게 전달되지 않겠지만, 결국 그렇게 가두거나 잡아먹어도 그 객체가 친구라고 배운다. 그건 확실히 거짓말이다. 공중파에서 대놓고 거짓을 교육하는 것을 내보낸 것이다. 


 미성년자 여성(걸그룹)이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나 핫팬츠를 입고 다리를 쩍 벌리고 허리를 흔들고 엉덩이를 내보여도 시청률만 올린다면 상관없는 방송국이라서 괜찮았을까? 저런 것은 애초에 사람들의 되지도 않는 감성을 이끌어내고 "아유 이뻐라~ 귀여워라~"할 수 있는 장면이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나처럼 생각해서 거부감을 느낀다.는 자체가 "재 뭐야? 장애인인가?" 라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다.  그들에게 난, 그리고 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난, 그저 따지기 좋아하는 장애인일 가능성이 높다.


 아이가 동물을 좋아한다. 그리고 같이 논다. 이 장면에 나는 한 치의 반대도 하지 않는다. 너무도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장소가 동물을 가둔 우리이며, 그 동물이 원래 거기 살던 동물이 아니라 다른 데에서 잡혀 온 것이라면 난 또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하긴, 나 같은 사람의 마음에 들려면 하루를 대서양이나 태평양 한 가운데 덜렁 빠뜨려놓고 거기에 지나가는 돌고래 떼와 놀게 해야 흐뭇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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