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 러브스토리 - 잔악한 것에 대한 고찰 (마이클무어)자본주의 : 러브스토리 - 잔악한 것에 대한 고찰 (마이클무어)

Posted at 2014. 3. 18. 12:40 | Posted in 리뷰/영화

  자본주의 즉 캐피탈리즘(CAPITALISM)을 마이클 무어 특유의 직설적인 시각으로 접근한 작품이다. 따지고 보면 마이클 무어가 직설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실에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이 작품은 2009년 작품이다. 그러니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큰 경제적 위기 상황을 미국이 만들어내고 부시가 퇴임하고 오바마가 당선된 그때이다. 수많은 미국인이 무주택자가 되거나 파산했다. 노동자가 해고를 당했고, 빈민은 늘어났다. 하지만 기업은 더욱 부자가 된 상황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는 생각이 든다. 현 2014년에 봐도 별 괴리감 없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어쩌면 현세대들이 받아들이고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일 것이다. 이 영화가 무조건 맞는 말을 한다고 할 수는 없다. 애초에 그게 맞는 말인지, 또 무언가 호도하는 말인지 모른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하나의 정답이 아닌 문제로써 받아들이게끔 하는 문제 제기는 충분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미국의 문제이며, 미국 경제 상황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한국사람은 화내거나 심취할 이유가 있다. 오죽하면 한국은 미국은 숨겨진 주, 라는 말이 있겠는가 수출 주도적 국가로서 국내에 테러가 발생하는 것보다 미국에 태풍 오는 게 주가에 더 영향을 미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미국보다 더한 천민자본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가 어떤 식으로 일반 국민의 생활을 침식했는지 보여주려 한다. 지미 카터의 연설부터 로널드 레이건의 취임 그리고 메릴린치 같은 투자 기업이 대통령을 만드는 것까지 상세히 보여준다. 정치도 돈이 필요하다. 많은 돈을 기부받은 정치인은 그만큼 그 기업에 관해 자신의 정치적 철학이라든지, 사회적 정의에 의한 일들을 실행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일 것이다. 


 분명 1960년대는 이런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이 정의나 철학의 문제였는가보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자본주의는 하위 서민층에게 생존의 문제를 안겨준다. 죽고 사는 문제 말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국민TV 임승수 씨는 '전 세계가 미국의 집을 짓는데 돈을 썼으며, 그 집들은 미국인들이 빚을 내서 사주다가 그게 힘들게 된 사태' 라고 정의하였다. 부의 성장을 빚으로 하다가 그게 힘들어지며 결국 연속 파산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그 파산은 전세계의 경제를 망가트렸다. 요컨대 빈민들의 빚을 담보로 기업들이 돈을 벌다가 수많은 서민 들과 세계 서민 국가들이 한꺼번에 타격을 받은 사건인 것이다.



 은행이나 투자회사들은 근본적으로 부를 늘릴 수 없는 구조이다. 물론 금융으로 수익을 올리는 것은 하나의 노동에 대한 대가로써 당연하다. 하지만 은행 같은 금융업의 수익은 그런 노동 가치가 아니라 돈놀이라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 돈놀이는 회사를 사고팔거나 집을 사고팔고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애초에 그 돈은 어디서 오는가? 고객에게서 온다. 고객은 그 돈을 은행에 '맡긴' 것이지, 융통하여 자금화하라고 맡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돈을 안전하게 맡기려고 은행에 가는 것이다. 좀 더 편하고 안전한 자금의 관리를 위해 은행을 찾는것이지, 결코 은행을 부자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난 통장을 만들 때 어떤 약관도 보지 못했다. 은행은 무단으로 내 돈을 융통하는 범죄 집단이다. 하지만 그 범죄가 당연시되고 사람들이 문제삼지 않는 이상 그들을 범죄집단이라고 말한 내가 무고죄로 감옥에 가는 가능성이 더 높은 사회이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사랑한다. 미국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일생의 1/3을 보내는 직장에서는 독재를 모두 묵인한다. 기업의 독재화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모두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기업은 한 사람이나, 주주라는 몇 사람에 의해 운명이 갈린다고 생각한다. 그 기업이 그렇게 클 때까지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한 직원들은 그 기업에 관한 어떠한 권한도 없다. 이것이 독재가 아니고 무엇인가? 영화 속에서 이런 물음을 던졌을 때, 나는 적잖은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나라도 물론 협동조합이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 기업은 경영진의 독재로 이루어진다. 한국이란 나라가 초반부터 독재로 시작해 1900년대 초반을 모두 독재로 보내서일까? 하지만 민주화가 되었다는 현재까지 기업이 떳떳이 독재하는 데 있어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옹호한다. 그 옹호하는 세력들의 말은 그렇게 해야 기업이 굴러가고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옹호하는 세력들은 결코 상류층이 아니다. 어떤 기업을 독재하는 경영진이 아니다. 달동네 사는 김씨, 노숙하는 이씨, 기초수급자 박씨이다. 기업이 많은 이득을 취한다고 그 사람들에게 절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 회사 직원이면, 계속 같은 월급을 받을 뿐이다. 분배란 없는 자본주의에서 하층민들은 분배를 바라고 기업을 옹호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이다는 헛된 망상을 품으며 희망으로 스스로에게 약을 치는 것이다.


 미국 부자들이 내민 자본주의는 성경의 진리와 맞닿아 있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다. 그래서 종교적 파워가 있나 보다. 우리나라도 기독교 국가이다. 백 미터 안에 교회 숫자를 보면 한국을 예루살렘화해도 될 것 같다. 각설하고 자본주의를 종교적 진리로 만드는 데에 어떤 논리는 필요 없었다. 자본주의는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았다. 하지만 주교나 신부들의 말은 하나 같다. 예수는 자본주의를 싫어했을 거라고 말이다. 가난한 자를 대함은 나를 대함이다. 라고 했나. 어쨋든 성경에서는 한사코 가난한 자를 위하라고 했다. 하긴 기독교라는 종교는 죄를 지은 사람들의 종교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돈이 사람 위에 서는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 돈이 다가 아니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나는 저주한다. 이미 돈이 다인 세상에서 사람의 일부 감정이나, 인륜은 돈으로 사지 못한다 하여 돈이 다가 아니라는 자위는 더욱 돈이 다인 세상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다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좋다. 그나마 솔직하기 때문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돈이 다다. 이른바 자본주의 사회는 무조건 돈이 다다. 그래서 한국도 돈이 다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어떤 것도 돈이다.


 미국의 중소기업이나 이제 시작하는 듣보잡 기업이 아닌 세계인들이 다 아는 큰 회사들이 있다. 월마트나 피앤지 뱅크 오브 아메리카, 아메리카 익스프레스 같은 기업들은 직원의 죽음까지 돈으로 환산 받는다. 보험을 넣는다. 물론 직원이나 그 가족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회사는 보험료라는 투자금을 내고, 그 죽음에 대한 수혜자가 된다. 노동자가 힘들게 과로할수록 수혜를 받을 확률이 커진다. 이를 '일꾼 보험' 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일꾼 보험이 비인간적인 이유는 그 보험에 '자살' 까지 보장되기 때문이다. 직원이 자살하면 기업은 이익을 본다. 사람의 생명이 하나의 돈벌이가 된다. 이런 세상에서 '아직은 살만하다던가', '돈이 다가 아니다.' 라고 헛소리하는 사람은 빠르게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좋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숨기려는 사기꾼이거나, 정말 순수하고 착하지만 하등 도움이 안 될 인간이기 때문이다. 



 미국을 민주주의 국가라거나 자본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티뱅크는 내부 문서에서 미국을 '금권주의' 국가라고 명시했다. 금권주의란 상위 1%를 위하여 하위 95%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재산은 맞먹는다. 이를 보면 한국도 금권주의 국가이다. 아주 심한 금권주의일 것이다. 이 체제는 마치 중세의 봉건주의보다 더한 착취의 형태이다. 그 착취의 행위 중에 어떤 폭력이나 억압, 부당 대우도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위층 스스로 자본주의에서 말하는 자유롭게 착취당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은 부당한 것에 대해 저항을 한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인간적으로 모멸을 주는 것에 대한 저항이 심하다. 예를 들어 한 라인에서 몇십 명이 업무상 화학약품 때문에 숨을 거뒀다. 하지만 회사는 산재 인정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회사를 크게 욕하지 않는다. 그 회사의 휴대폰을 살 사람은 여전히 사고 있고, 그 회사의 자동차를 사고 서비스를 산다. 하지만 전화상으로 '을'에게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한 '갑'을 둔 회사의 경우 적어도 인터넷여 론에선 거의 상장 폐지된 기업이 있다. 그 기업이 이뻐서 이러는게 아니라, 폭언한 것은 큰 불매운동으로 변했지만, 사람을 죽이고 죄송하다고 하고 또 죽이고 또 죽이고, 결코 산업재해로 인정을 안 하는 행위는 아무 여파도 없다.


 이 영화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인트로이다. 고대 로마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을 교묘하게 보여준다. 로마는 휘황찬란한 상위층의 문화가 있었다. 그 문화를 지탱하기 위해 드넓은 빈민촌이 형성되었다. 라는 멘트가 나가며 현재의 아프리카와 빈민국들의 삶을 보여주었다. 맞는 말이다. '지구의 인구가 100명이라면?' 이라는 책이었나, 글귀에서도 통계적으로 현재 나와 같은 혹은 평균의 한국인이 누리는 부는 굉장히 상위의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그 상위들의 삶을 위해서 많은 빈민이 필요했고, 지금도 그것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빈민들의 안식과 안정을 위해 전차 경주나 검투시합 혹은 연극을 보여줬다. 라는 멘트가 나오고 영상은 레이싱 시합, K-1과 프로레슬링, 포르노를 암시하는 영상과 각종 미디어를 암시하는 영상을 보여줬다. 이 또한 맞는 이야기 아닐까? 한국도 그렇다. 지금부터 일일드라마를 아예 금지 시키고 프로야구를 개막하지 않고 아이돌들을 모두 수감한다면 어떻게 될까? 일주일 내에 두 번째 4.19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물론 그 이유가 '우리에게 드라마를 달라!' 라고 외치는 아줌마 부대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고싶다!' 라는 사람들의 외침일 가능성이 크지만, 결국엔 '우리에게 이 현실을 잊게 할 합법적인 마약을 달라!' 라는 말과 별 다르지 않다.



 경제학적으로 나는 문외한에 가까울 것이다. 가까운 은행에 가서 통장을 만들고 돈을 넣고 빼고 그 돈으로 물건을 산 다음 지불을 하고, 내 노동력을 팔아 돈을 받고 정도가 내가 돈을 사용하는 범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 보자, 연말연시 따뜻한 이웃들의 관심이 필요할 때 아침 일찍 벤츠를 타고 와 누더기를 걸치며 오늘은 얼마나 벌려나? 라고 생각하는 노숙노동자가 있다. 차가 없는 내가 지하철에서 그를 발견하고 날씨도 쌀쌀한데 너무도 남루해 보이는 차림에 측은지심이 생겨 만원을 그의 앞에 있는 깡통에 집어넣는 기부 행위도 하나도 경제활동이다. 한 달에 2~300만 원의 소득과 4~500만 원의 지출은 삶을 고달프게 만든다. 그 와중에 소문으로 옆집에 누가 혹은 동창 중에 누가 주식을 해서 땅을 사고 집을 샀다는 말이 들린다. 나도 당장 계좌를 트고 백만 원 정도를 입금해서 이름이 맘에 들거나 왠지 돈이 많을 것 같거나 아니면 평소 많이 듣던 기업의 주식을 산다. 나름 공부한다고 해봤자 책 한 두권 읽는게 전부이지만, 나름 하루 이틀 경제 신문지까지 봤다면 공부 꽤나 한 것이다. 그게 망하든 잘되든 그것도 하나의 경제 활동이다. 아마 서민이라는 사람들의 경제 활동은 딱 이 정도 아닐까? 하지만 그 서민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는 다른 경제활동들이 있다.


  파생상품에 대해 설명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네이버에 파생상품을 쳐보았다. 


파생상품(Derivatives) 이란 기초자산의 가치 변동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금융 상품을 말한다고 한다. 기초자산이라는 원래 있는 자산의 가치가 어떤 이유로든 변동되는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금융 상품.. 


 참 어렵다. 어떤 자산이라도 그에 관한 가치가 있다. 그 가치가 변하면 그것에 대한 값이 달라진다. 그것은 가격이다. 그런데 파생상품은 그것에 관한 금융상품이라는 말이다. 영화에서도 꽤 좋은 대학의 수재였으며 파생상품을 담당했던 임원에게 파생상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지만, 속 시원하게 설명하진 못한다. 그런 설명도 못 하고 이해도 못 할 정도의 어이없는 상품을 만드는 이유는 사람들이 모를수록 사기 치기가 편해서라고 영화에선 해석한다.



 자본주의의 이런 폐해에 대한 솔루션으로 영화는 '사회주의'를 암시한다. 그런데 이게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라는 것은 너무도 쉽게 예측 가능하다. 한국만 해도 사회주의라는 말은 거의 금기시 되고 있다. 학문으로써는 써도 되지만 사회주의를 합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잡혀갈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대에서 미국은 소련이 실천하는 사회주의를 미워할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의 분노를 하나로 모으는 데에 사상에 의한 결집과 미움은 언제나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콧수염이 맘에 안든다고 선전한다면 그것을 보고 분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이 실행하는 사회주의는 일률적이고 개인의 인권이나 자유나 가능성이 없다고 선전한다. 물론 자본주의에 그것이 있다고는 말 하지 않는다. 그냥 넘어갈 뿐, 그것을 본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멸시하게 되고 반대급부로 자본주의를 맹신하게 된다. 


 소련의 스탈린이나 중국의 모택동 북한의 김일성까지 사회주의를 채택했다. 하나같이 망했다. 덕분에 자본주의의 상위층에서 언제나 안락한 부자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다시 분배하자는 사회주의라는 말도 안 되는 체제에 대해 사람들이 스스로 거부하게 만들 수 있었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레드 컴플렉스는 거의 병적이다. 하지만 진짜 반공을 하자고 하면 또 싫다고 한다. 적당한 반공을 원한다. 그 적당함이란, 부를 많이 가진 자와 권력을 많이 가진 자가 지정한 사람이나 단체만을 반공 식별하는데 의의가 있다. 어쨌건 그런 병적인 레드 컴플렉스는 결국 사회주의 혐오로 이어졌다. 그 체제가 원하거나 지향하는 바는 상관없다. 일단 빨갱이가 하는 정책이니 빨갱이정책이고 배척해야 되는 것이다. 빨갱이가 응원하는 야구팀, 축구팀을 응원해도 빨갱이고 빨갱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어도 빨갱이다. 물론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 한해서 말이다. 


 하지만 세계의 많은 선진국은 이미 사회주의를 발전시키고 이룩해야 될 체제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 이른바 사회민주주의이다. 애초에 사회주의는 공산주의가 아니다.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와 반대되는 말이 아니다. 프랑스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스웨덴 캐나다 노르웨이 뉴질랜드 듣기만 해도 우리나라보다 잘 살고 잘 먹는 나라들이다. 이 나라들에 사민주의 정당들이 존재한다. 


 물론 나는 그래도 자본주의를 숭배한다. 나같은 수많은 빈민 또한 자본주의를 숭배한다. 부자들은 빈민들에게 언제나 자기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성실하고 열정적이고 긍정적으로 살라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쟁취하라고 한다. 자본주의는 자유 경쟁을 뜻하며, 이윤 동기를 제공한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에 관해 분배에 힘을 쏟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천원을 가진 아이가 너도 나처럼 천원을 가질 수 있으니 언제나 힘내고 좋게좋게 생각하라고 한다. 그 천원은 천원을 가지지 못한 아이들에게 뺏은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 애초에 그 돈을 나눠서 맛있는 것을 사 먹거나 장난감을 살 생각은 없다. 게다가 계속 뺐을 것이다. 몰래몰래 아이들이 힘들게 모은 것을 가방에서 지갑에서 빼갈 것이다. 내가 너무 비약한 것도 같은 생각이 드는 사람은 저 아이들중 착하고 순수한 아이들일 것이고, 맞다고 생각하며 퇴근 준비를 하는 사람이면 그냥 보통의 아이일 것이다. 


 영화는 나온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한번은 꼭 봤으면 하는 영화이다. 자본주의 안에 살면서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비판해봐야 무슨 소용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 그 생각이 맞을 것이다. 나 혼자 혹은 소수가 그것을 파악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이 견고한 부의 권력은 아마 무너지기는커녕 더 억압적으로 우리를 착취할 것이다. 혁명을 이루고자 함이 아니다. 작은 변화들을 일으키자는 생각이 크다. 


 이런 견고하고 튼튼한 자본주의 속의 부자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평등한 투표권'이라고 한다. 마천루에 앉아 1초마다 셀 수 없는 돈을 버는 경영자와 지하도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지내는 노숙자는 평등하게 한 표의 투표권을 가진다. 그 투표권으로 선출된 사람은 평소에 자본주의에 대해 엄청나게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 간담이 서늘한 상황을 부자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권의 유력한 정치인에게 언제나 돈을 쏟아 붓는다.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든다. 혹은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한다. 


 버스비를 70원으로 알면 어떤가? 돈만 많아 보이면 그를 찍음으로써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나 그가 돈이 많아 권력을 쥐는 것은 도와야 나에게도 콩고물이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골빈 유권자들은 언제나 존재하는데 말이다. 자본주의는 이렇게 정치를 더럽히고, 국민의 의식을 저하한다. 그럼에도 나는 자본주의를 신봉한다. 한국 사회에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사람은 자동으로 공산주의자가 되고 공산주의자가 되면 모든 체제를 인정한다는 민주주의 국가임에도 언제나 간첩이 될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설명했다. 난 이 영화를 추천하지만, 근본적으로 자본주의를 신봉한다. 마지막으로 만세 삼창하고 글을 마무리하겠다. 자본주의 만세.만세.만세. 우리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은 이래야 되는 세상인 것이다. 그에 관해 감사함을 전한다. 어르신들의 죽음은 남은 사람들에겐 부의 재분배 기회이며, 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는 기회로 각인하는 것은 빨갱이를 그토록 싫어하는 어르신들이 바란 자본주의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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