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약속 - 거짓말 같은 잔혹 실화또 하나의 약속 - 거짓말 같은 잔혹 실화

Posted at 2014. 3. 17. 12:58 | Posted in 리뷰/영화

 이미 또 하나의 약속이라는 영화를 가지고 3번째 포스팅이다. 보기 전 생각, 그리고 개봉하고 나서의 반응들을 본 생각 그리고 이제 보고 나서의 생각, 생각들이 정리가 안 되는 느낌이다. 머릿 속에 조각난 생각들이 돌아다니는, 아니 도망 다니는 느낌이다. 익히 알고 있는 실화이지만 포스터를 보면 부성애에 초점을 맞춘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영화에서 부성애는 두 번째 소재이다. 첫 번째는 분노이다. 




또 하나의 약속 (2014)

Another Family 
9.7
감독
김태윤
출연
박철민, 김규리, 윤유선, 박희정, 유세형
정보
드라마 | 한국 | 120 분 | 2014-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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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같은 거 들지 말고 데모도 하지 말고.." 

"선생님이 우리 회사는 그런 거 없데, 월급을 많이 줘서 그런 거 없데"


 돈 잘 주는 회사에 들어간 딸은 가족의 자랑거리였다. 딸이 자랑스러운 건가 아니면 그 딸이 그 회사에 들어갔기에 자랑스러운 걸까? 이 영화를 최대한 드라이하게 볼 필요가 있다. 머리를 최대한 식히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지 않게 기분을 가라 앉혀야 한다. 이 영화를 보고 우는 것은 이 영화의 속편이 탄생하게 하는 소모적인 감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제작자 입장에서는 울든 웃든 많이만 봐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다 해도 나쁜 게 아니다. 당연한 거다. 제작자는 패스하고 관객들이 중요하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회사에 들어갔다고 좋아하는 모습은 여느 가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실화를 바탕으로 생각해보더라도 이 가족은 그 전에 죽거나 병든 삼성노동자들을 아예 모르는 평범한 우리와 같은 혹은 많은 관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걸 보고 "아 우리도 저 꼴 날 수 있는 거구나."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저 불쌍하다. 또는 조금 더 나가 "도와주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사람은 경험의 여부에 의해 어떤 사건을 인식하는 강도는 틀리다. 이 영화가 재미없더라도 우리가 집중해서 봐야 하는 이유이다. 



 취직에 성공하여 고향을 떠나는 버스에서 그녀는 창밖의 경치를 본다. 낙후된 동네를 떠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 이제 집안의 기둥이 될 거라는 생각? 그 생각이 어떤 것이든 그에 관한 결말은 그녀가 원하지 않았던 것이 확실하다. 


 가족 중에 중병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가정이 파탄 난다.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조각조각 부서진다. 하지만 영화에서 극화된 그녀의 가족은 금이 갔을 뿐 부서지지 않았다. 


 감독마저도 그녀의 죽음에 대해선 극화를 하지 못한 것 같다. 다행이다. 사람의 죽음을 담보로 눈물샘을 짜려는 시도가 있었다면 석연치 않았을 것이다.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닌데, 여느 감동 카테고리의 영화들과는 다른 감동을 받았다. 그게 영화 때문이건 실화라는 사실 때문이건 말이다.



 대한민국 최대의 회사, 연 매출은 천문학적이며, 국가를 움직이는 경제의 주축이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제공한다. 이 회사가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사람도 여럿이며, 정부 또한 이 회사에 대해 많은 지원과 규제 완화를 하고 있다. 그런 회사이면 사람을 죽여 놓고 발뺌해도 되는 걸까? 그런 회사이기에 더 책임감 있게 행동해야 하지 않았을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것 같다. 


 다수는 소수를 희생해서라도 다수가 좋은 쪽으로 간다. 공리주의? 아무튼, 이 영화를 보면서 나도 아직 그 다수에 해당한다는 것을 느꼈다. 소수가 승리하여 회사에 영향을 미치고, 회사 세가 작아져, 고용률이 줄고 매출이 줄면, 국가적인 경제 타격은 물론 안 그래도 높은 실업률은 하늘을 뚫을 것이다. 그 사람이 죽으면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며, 그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수는 우리다. 우리는 우리의 일자리나 우리 자식의 일자리가 될지도 모르는 그곳에 대해 나쁜 소문이 돌지 않길 원한다. 영화를 보면서는 그런 생각을 안 할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면 회사는 나쁜 회사이다. 하지만 막상 그 회사의 면접을 본다거나 시험을 칠 때는 어떨까? 다수는 천민자본주의 우리에게 몸에 베개 한대로 하게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그런 다수가 많은 나라이다. 그래서 그런 다수가 많아지면 소수에 대한 부당함은 순식간에 관심에서 멀어진다. 다수는 "미안하지만.." 이라고 말하려나? 


 양아치가 제일 무서울 때는 그 뒤에 조용한 침묵으로 동의를 해주는 착한 많은 학생이 있을 때 아닐까? 착하고 순하고 정 많고 죄 안 짓고 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우리네 이웃들 국민이란 이름의 착한 학생들은 어쩌면 회사라는 양아치에게 소름 끼치는 침묵으로 동조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믿을만한 회사고, A/S도 잘되고 믿을만한 투자처이며 품질 좋은 제품은 거기가 최고 아닌가? 하며 그 회사의 핸드폰이며 냉장고를 사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 주위의 착한 이웃이다. 



 자본에 대한 이유 없는 맹신도 느꼈다. 자본은 감정이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본을 믿는다. 그 믿음은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규모가 큰 자본은 어떻게 그런 광신도들을 만들 수 있을까? 그 광신도가 자본이라는 종교에 학살을 당하더라도 다른 광신도들은 자본을 탓하기는 커녕 학살당한 광신도를 비난하고 자본을 두둔한다. 같이 살아가고 같이 일하는 동료보다 자본에 큰 호의를 베푸는 일이 영화라는 픽션이 아니라, 우리 사는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이라는 것은 나 말고도 많은 사람이 공감할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잔혹하다. 호러 무비이다.


 이 영화는 '너희를 깨우쳐 주기 왔다!" 라는 계몽 영화가 아니다. 무언가 흐름을 바꾸려는 혁명 영화도 아니고, 선전 영화도 아니다. 약간의 극화와 진짜 있었던 일을 혼합한 호러 무비이다. 그 호러가 B급이 아니라 A급 수준의 것이다. 흔히 일어나지 않을 일 그러니까 잘 자던 사람에게 전기톱 살인마가 나타나는 B급 호러도 우리를 자극하지만, 진짜 있을 일 우리 생활과 밀접한 일, 우리 이웃에게 벌어지고 있는 무서운 일이기에 A급 호러이며, 우리를 자극하기에 앞서 분노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난 자본주의를 신봉한다. 그것이 고고한 자본주의든, 천민자본주의든 간에 난 자본주의가 좋고, 자본을 사랑하며, 갈망한다. 하지만 그 자본이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계층을 가르는 준엄한 심판자임도 인정한다. 스톡홀롬 신드롬일까?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것에 대해 사랑을 느끼니까 말이다. 


 독재는 한 사람에 의한 지배이다.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자본으로 치환된 것뿐 다른 것이 없다고 느껴졌다. 자본의 독재화. 그 자본에 대한 신앙심에 가까운 광기는 자발적인 광신도를 생산한다. 거의 시스템적인 그 획일화에 나 또한 수용당했음을 본능으로 느꼈다. 그 자본의 독재는 그 독재로 인해 피해를 얻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원한다는 것이 큰 강점이다. 자본에 의해 다쳤음에도 자본으로 그것을 용서할 수도 있고, 삭힐 수도 있다. 이 전지전능한 자본의 존재가 더 크게 내 안에서 부각되었다. 권선징악, 사필귀정의 우리네 정서를 생각하더라도 자본은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 아무리 더럽게 나쁘더라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며 합의를 종용하고 많은 사람이 포기를 함에 그것이 나쁘다고 말리지 못하는 것도 사실 아닐까? 


"소송을 포기하시면 10억을 드리겠습니다. 산재는 인정 못 해 드립니다." 


 10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영화가 아니라 제 일이었다면 많은 사람 중 과연 몇이나 영화 속 아버지 같은 결정을 할 수 있을까? 당장 나를 생각해보더라도 난 받았을 것이다. 난 나의 자식을 죽였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거나 이 돈 안 받는다고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오냐 라든가 같은 적당한 합의를 마음속으로 할 것이다. 아직 자식이 없어서 그럴까? 자식 있는 사람이라고 다를까? 이미 죽은 자식인데? 자식이 죽든 부모가 죽든 사랑하는 사람이 죽든 그 죽은 사람의 목숨은 산 사람에 의해 돈으로 환산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아버지와 가족은 그것을 거부했다. 



 미쳐 생각이 닿지 못했던 산재 보험의 특성에 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산재보험도 보험이라는 것이다. 꾸준히 보험료를 노동자는 납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는 곳에서 아예 산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산재 보험은 보험료만 쌓이고 나가는 돈은 없게 된다. 즉 돈을 번다. 산재보험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공기업 같은 것이라고 알고 있다. 공단이라고 하나? 아무튼, 그런 행태를 보면 기업과 공단 즉 기업과 정부 간의 기브 앤 테이크라는 생각도 든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인정도 안 해주고, 보험료도 안 나가고 말이다. 회사와 공단의 관계는 좋을 것이다. 이것도 하나의 정경유착의 형태가 아닐까? 물론 영화에서 말이다. 


 최대한 드라이하게 최대한 감동 코드는 빼고 감상하려고 맘을 먹고 봤다. 하지만 결국 몇 번인가 울컥한 것은 어차피 나라는 사람도 같은 노동자이며, 거대 자본과 그에 심취한 다수의 사람에 의해 똑같은 상황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다. 그래서 이 영화는 슬프고 무섭다.


 또 하나의 약속 이란 영화의 결말은 나지 않았다.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많은 관객수를 동원했으면 했지만 역시나 상영관을 도구로 방해를 했는지 어쨌는지 뒷받침이 되지 않았나보다 이제 VOD도 제공하는 것 같으니 안 봤으면 봐도 괜찮은 영화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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