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인 - 19XX년 손바닥으로 가려진 하늘변호인 - 19XX년 손바닥으로 가려진 하늘

Posted at 2014. 3. 14. 17:04 | Posted in 리뷰/영화

  이제야 제대로 변호인이라는 영화를 봤다. 표를 2장이나 샀지만 결국 집에서 4천 원주고 다음에서 다운받았다. 너무나 유명한 영화였고 많이 본 영화를 리뷰해서 머하겠나 싶다. 리뷰가 아니라 그저 내 기억속에 담아두는 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 맞는 거 같다. 확실히 말해서 영화는 노무현이라는 전 대통령이자 인권변호사를 가르키고 있었다. 송우석이라는 변호사는 확실히 그의 삶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영화는 픽션이다. 어떻게 치장해도 영화는 결국 거짓말이다. 사실에 입각해서 찍는다 하여도 극화된 부분은 어쩔 수 없이 들어간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변호인은 참 머랄까 무서운 영화이다. 시대의 갈망이었던 민주주의를 재료 삼아 이 시대의 사람들이 원하는 정의를 보여주었다. 



 이 영화라는 국밥에 재료는 사람들이 보기 좋아하고 듣기 좋아하는 노무현이라는 삶을 일부 떼어넣고, 쓰라릴 정도의 아픔을 간직한 우리 서민이라는 사람들이 공권력에 밟힌 자국도 덜어 넣었다. 이유 없이 고문 당하는 사람의 트라우마를 양념 삼아 돈을 원하던 사회 기득권층이 우리 서민을 위한 사람이 되었다라는 잘 익은 속살까지 넣었다. 그런 국밥은 대부분 서민이라고 지칭되는 관객들에게 너무나도 달콤한 한 그릇의 국밥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내용은 일명 부림사건이란 사건을 기초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난 그 사건에 대해 잘 모른다. 그저 죄 없는 사람들이 고문을 받고 희생된 안타까운 사건이란 것만 안다. 그 사건을 법정에 풀어나가는 모습을 사람들은 많이 기억한다고 한다. 난 솔직히 송우석이 변호사로 성공하고 다시 국밥집을 찾아 아지메 한 번 안아봐도 되겠습니까? 라고 말한 장면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무전취식자가 금의환향했다. 우리 젊은이들은 시대의 무전취식자들이다. 물론 부모의 등골을 담보로 어떻게 완전한 무전취식은 피하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이 시대의 젊은이이다. 송우석이 다시 저 국밥집을 찾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맞거나 혹은 고소당할 생각을 하고 갔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몇 십년 전에는 이른바 인심이라는 것이 존재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변호사로 성공했지 않은가? 무전취식자라도 성공하면 그 피해자에게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교훈을 받았다. 세상은 역시 성공하고 보면 다들 좋은 사람인 모양이다. 



 송우석 고졸이지만 변호사인 그가 한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서울대씩이나 들어간 사람들이 공부하기 싫어서 데모한다' 송우석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정의롭고, 대차며, 온화한 아버지였다. 그가 그의 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맨손으로 기득권층에 도달한 경험때문일까? 2014년 현재의 대한민국은 자수성가하는 길이 많이 좁다고 한다. 그 말은 옛날에는 자수성가하는 길이 더 넓었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자수성가했으며 먹고 살만하고 사회적으로 존중도 받는 변호사가 저렇게 생각할 정도였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안봐도 뻔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영화의 배경은 더욱 검게 보였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라는 말이 이 영화를 대표하는 명대사라고 한다. 글쎄 정말 국가는 국민일까? 국가는 국민일 수 있다. 다만 선거철의 라는 수식어가 붙어야 되지 않을까? 국가는 선거철의 국민입니다. 선거철에는 국민이 주인이다. 딱 그 며칠만은 국민이 왕이고, 상전이다. 하지만 그 며칠을 뺀 몇년은 다른 사람이 국민 같다. 어쨌든 영화에서는 선거도 필요 없는 독재시절이었으니 영화속 송우석이 말한 국가란 국민입니다. 라는 말은 거짓이 된다. 내가 영화 속 공안경찰이었다면 아닌데? 국가란 독재자건데? 라고 말했을 것이다. 물론 잘못된 현상이긴 하지만 엄연히 사실이다. 저때는 민중을 후드러패는 지팡이었던 경찰이지만, 공무원으로서 국민에게 거짓말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시원하게 국가란 독재자 것이고, 너희는 노예며, 말 안 들으면 너네 집 책상을 탁! 쳐버린다. 그렇게 해서 죽은 사람도 있다! 라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저 사람은 참 나쁜사람이다. 하지만 저 때의 관점에서 보면 나라에 안보를 걱정하고 빨갱이를 때려잡는 애국자이다. 아버지는 6.25 때 학살을 당했으니, 그의 피가 빨갱이 피인지 애국자 피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빨갱이로 지정된 자들을 괴롭히니 그는 애국자 였을 것이다. 나의 생각이 아니라 아마 그때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삼시 세끼 꼬박 잘 먹고, 고도의 경제 성장으로 많은 금전을 취득할 수 있으니 이렇게 좋은 세상인데 한 번 씩 데모나 하고 시위나 하는 멍청한 빨갱이들이 눈에 거슬린다. 그런 빨갱이들을 잡아다가 좀 후드러팬들 무슨 죄일까? 좀 죽인들 무슨 죄일까? 하지만 우리집 자식 만큼은 빨갱이가 아니겠지.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무려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영화를 찬찬히 보니 그럴만했다. 재미도 있었고 영화평론가 처럼 연기나 완성도나 조명이나 카메라워킹 따위를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냥 보기에 편했다. 


 영화의 장르는 히어로물이다. 이건 확실하다. 이 영화는 법정물도 아니고, 성장물도 아니고, 스릴러물도 아니다. 범죄물도 아니다. 이건 히어로 물이다. 기득권층에서 홀연히 나타나 못 배우고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해 싸워주는 브루스 웨인! 딱 그것을 본 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배트맨처럼 악당들을 쳐죽이지는 못한다. 페이크 다큐이기 때문일까? 이왕 히어로물을 할꺼면 악당들을 용암 속에 던졌으면 어땠을까 싶다. 



 영화의 배경인 19XX년대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는 시대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하늘을 가리는 것이 손바닥이 아니라 미디어나 가십으로 바꼈을 뿐이다. 우리는 몇 십년전 이야기를 보고 감동을 받고 몇 년전 죽은 사람을 떠올린다. 하지만 왜 몇 일전 이야기를 듣고 슬퍼하거나 화내는 사람은 천만이 안되는 걸까 왜 어제 죽은 사람을 떠올리지는 않을까? 


 송우석이 재판장에서 끌려나올때 외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봐라!" 손바닥으로 하늘은 가려진다. 그리고 손바닥을 빨갛게 칠하면 눈에 빨갱이들만 보인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 장년층은 다 그런 과거를 겪지 않았나. 나한테 거역하는 사람들은 다 빨갱이야! 라는 거대한 손바닥에 현재 잘 생존하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 손바닥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손바닥은 하늘을 가릴 도구이다. 영화로 하여금 현실에 비추어 괜한 희망고문을 하는 혁명적인 영화들이 있다. 내용이 좋다 나쁘다 재미가 있다 없다로 판단되고 나서도 이 영화를 보라 우리는 승리한다 혹은 패배한다 같은 일종의 시대정신이나 시대 의지까지 변화시키는 영화들이 있다. 아무리 현실을 잘 반영했다 하더라도 그런 영화로 우리에게 알 수 없는 의욕이나 정의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 영화 역시 현실을 가리려는 한 개의 손바닥 밖에 되지 못한다. 변호인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될 뻔 했다. 권선징악, 역사는 그렇지 않음에도 상업적으로 사람들이 봐줘야 하기에 인위적인 권선징악의 장치를 넣었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손바닥 같은 영화가 될 뻔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시대물이 아닌 히어로물이다. 별 생각 없이 하지만 저런 비슷한 사건이 실제로 있었으며, 왜 일어날 수 있었는지 생각하며 봐야 하는 영화다. 그냥 돈만 내고 아무 생각 없이 봐도 볼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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