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12년 - 두 가지 인생을 산 한 남자의 실화 (스티브 맥퀸)노예 12년 - 두 가지 인생을 산 한 남자의 실화 (스티브 맥퀸)

Posted at 2014. 2. 24. 00:51 | Posted in 리뷰/영화

 노예 12년이란 영화의 설정은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분노' 라는 감정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 분노는 영화가 진행하면 할수록 다른 감정으로 바뀌어간다. 무조건적인 분노를 자아내어 이미 종식된 사회적 이슈로 상업적인 성공만을 바라고 영화가 진행되었다면 아마 이 영화는 매우 꼴배기 싫은 작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한번의 풍랑을 거치면서 점점 잔잔해진다. 반전이나 스릴의 요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스토리 자체의 힘이 너무 좋았다. 오랫만에 느껴보는 잔잔한 재미가 신선할 따름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매우 좋았다. 요즘 한창 영드 셜록으로 인기몰이 중인 베네틱트 컴버배치의 착하지만 어쩔 수 없는 지주의 연기도 좋았고, 생긴대로 정의감과 좋은 짓만 하는 브래드피트의 연기도 좋았다. 그리고 주연인 에지오포의 연기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에지오포라는 배우는 안젤리나 졸리와 함께 솔트 라는 영화에도 출연했었고, 생각보다 주연을 맡은 영화가 꽤 되었지만 생소하게 느껴졋다. 그만큼 노예 12년 이라는 영화에서 그의 연기는 무언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부당하게 노예가 되는 과정, 그리고 끌려가서 폭력에 시달리는 장면, 충실한 노예가 되는 장면 모두 너무나 무덤덤했다. 게다가 관객이 모두 예측가능한 방향이었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에지오포의 눈빛 하나하나가 그의 심정을 잘 표현하는 것 같았다. 



 이 영화에는 2가지 큰 방향이 제시되어 있다. 하나는 납치와 인신매매라는 범죄이고, 다른 하나는 노예 제도 이다. 인류가 도래하고 문명이 발달함에 어떤 문명이건 노예는 존재했다. 우리 한국도 마찬가지로 '노비'가 존재했다. 영구 미국 또한 아프리카 중서부 지방의 사람들을 잡아들여 노예로 삼았다. 노예는 재산이었다. 사람을 사람이 아닌 물질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피부색깔이 달라서 였을까? 의외로 인간은 시각적인 혼란에 아주 약한 동물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자신이 알던 사람이 재해를 당해 온몸에 화상을 입는다고 가정하자. 그 다친 사람은 온몸이 일그러지고 굉장히 흉물스러울 것이다. 그러면 그 알고지내는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 사람은 정확히 말해 피해자이자 다친 사람인데도 사람들은 흉몰스럽다는 이유로 그를 기피할 것이다. 흑인은 왜 백인의 노예가 되어야 했을까? 과학 기술 문화 모두 뒤떨어진 아프리카 태생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더 막강한 힘과 잔인함을 갖춘 백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직 미개한 그들을 자신의 재산으로 만들었다. 마치 산에서 살던 야생 동물을 인간들이 포섭하여 애완으로 삼거나 몸보신거리로 삼듯이 말이다. 


 미국의 경우 많은 사회인사들이 노예문제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역시 천조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국 북부 지방에는 거의 노예가 없었고 남부지방에 면화작물지방이나 농업지대에 많이 퍼져있었다고 한다. 현대적이고 편한 농기계가 없었던 옛날 크고 넓은 토지를 가꾸고 관리하기에 많은 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노동자 보다 노예가 제 격이었을 것은 당연지사다. 노동자는 월급과 복리후생과 인권을 제공해야한다. 하지만 노예는 밥을 제공하면된다.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그래서 노예제도가 그렇게 없어지기 힘들었나보다. 영화에서도 대규모 목화재배가 나온다. 노예들은 쉴새없이 일을 하고 주인의 수발을 든다. 노예들의 노동은 모조리 주인의 것이 된다. 



 노예들이 주인을 위해 일을 한다. 그리고 먹을 것과 잘 곳을 제공 받는다. 그리고 칭찬을 받거나 매질을 당했다. 난 기본적으로 노예제도와 자본주의가 거의 같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같은 개념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오직 자본에 의한 주의이다. 옛날에는 몇몇 권력자에게 종속된 노예 였을 사람들이 자본의 노예가 된 것 뿐이다. 우리는 자본에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고, 잘 곳을 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본을 위해서 우리는 일을 한다. 물론 저 시대보다는 더 나아졌다. 자본은 우리에게 매질을 하지 않으며, 성폭행을 저지르지도 않는다. 게다가 절대 이루어지진 않겠지만 희망마져 준다. 종이가 우리를 때리진 못한다. 하지만 그 종이에 잉크를 덧칠해 돈이 되면 그 돈을 가지게 위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매질하거나 죽일 수도 있다. 일부러 비교한것은 아니지만 자동으로 대조가 되어보니 더 흥미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노예들을 보며 한가지를 깨달았다. 노예들은 자신이 노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은 인신매매로 인해 노예가 되었다. 그는 극렬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어느새 저항은 폭력으로 인해 줄어들었다. 하지만 마음 속의 저항은 계속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난 노예가 아니며, 난 물건이 아니라고.' 하지만 다른 노예들은 달랐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물건 취급했다. 자각하지 못하는 인간은 정말 물건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싹했다. 주인공이 백인 관리관을 때려 벌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이 고통 속에 있어도 뒤에서 어린 꼬마 노예들이 즐겁게 뛰놀았고, 어른들은 다들 자신의 할 일을 하였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D%8C%8C%EC%9D%BC:Emancipation_Proclamation.PNG


링컨으로 유명한 '노예해방선언' 에 관한 지도이다. 빨간색은 노예해방의 대상 지역이었다.



 요즘 정말 핫한 영국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언급 안 할 수가 없다. 셜록이라는 영드로 국내외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기에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그는 착한 주인이다. 직접적으로 납치당한 주인공을 처음 '구매' 한다. 관객이 보기에 그는 정말 착하게 보일 것이다. 실리적이고, 인간다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노예 이용자이자, 구매자이다. 주인공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려하자 격렬하게 회피하는 장면은 뇌리 속에 깊이 남아있다. 분명 저 시대에도 컴버배치와 같은 사람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기본적인 심성도 착하고 인간적이지만 노예를 부리는 사람들 말이다. 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가책을이나 죄책감을 느꼈을까?



 미국은 기독교 신앙이 주된 나라이다. 영화에서도 지주들은 항상 성경을 인용하고, 안식일을 지킨다. 훅 지나가는 장면이엇지만 노예에게도 안식일을 지키게 했던 것 같다. 그들은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한 손에는 채찍을 들었다. 그게 가능하려면 원초적으로 흑인 노예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안될텐데도 지주들은 그들과 성경을 같이 읽는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강아지라고 하여도 진지하게 같이 성경을 읽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주들은 그렇게 했다. 그러면서 채찍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 본래는 그런 노예을 다스리기 편한 잔혹한 성품이라는 것 아닐까? 구절구절마다 은혜로운 성경구절을 읊어대는 그 장면에서 나는 구역질이 났다. 딱히 기독교를 배척하진 않는다. 하지만 종교로써의 구실인 기독교와 생존으로써의 구실인 노예들을 이분화하여 대하는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이 매우 거북하였다. 



 노예들의 모든 것은 주인의 것 이었다. 그것은 여자의 성도 마찬가지였다. 여자 노예는 주인에게 성적 쾌락을 제공하는 도구도 되었다.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성 뿐만이 아니다. 자식을 낳으면 자식도 노예가 되었다. 주인의 관점에서 노예를 생각하면 이런 이상적인 생활이 있을까? 하지만 제목처럼 이 영화는 노예의 관점을 사용한다. 여자노예는 주인공에서 한가지 부탁을 한다. 바로 '죽여달라' 이다. 삶과 죽음에서 인간은 온 힘을 다해 삶을 원한다. 자살하는 사람들도 죽기를 원한다기 보다는 살기가 싫은 것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극 중 여자노예도 마찬가지다. 아! 죽고싶다. 가 아닌 아! 살기 싫다. 였을 것이다. 죽음보다 못한 삶을 강요받는 노예의 꿈은 죽음 이었다.



 역사적으로 링컨이란 사람이 노예해방선언을 하고 미국은 노예제도가 사라졌다. 물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문제는 아직도 있다고 한다. 흑인에 대한이 아닌 유색인종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백인우월주의는 언제나 깔려있는 악성코드와 같다. 하지만 영화에서의 폭력과 인권유린 노동착취는 그런 인종차별을 감사히 여길 정도의 처참한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미국은 대통령이 나서서 선언을 하고 전쟁까지 치루는 홍역을 거쳐서야 노예제가 폐지 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노예제가 폐지된 적이 없다. 역사적으로 그렇다. 한국전쟁 이후 많은 인명피해와 아수라장 속에서 많은 신분세탁이 일어났을 것이다. 재건을 위해 모은 사람들이 예전 노비였는지 선비였는지 알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운이 좋은 것인지 한국의 노비제는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얼마나 많은 흑인들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납치되고 노예로 팔렸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사회적 합의에 의한 미개함이나 야만성은 그 깊이를 모를 만큼 깊은 심연의 느낌이 난다. 답이 없는 문제나 풀 엄두 가 안나는 실타래처럼 느껴진다. 


 사회적 합의만 하면 우리는 노예제도를 부활 시킬 수 있다. 인간을 사유화 할 수 있고 각종 인권유린이 가능해진다. 그런 일련의 행동들이 '보편적 가치' 가 되버린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야만적이고 비상식적이지만 법제화 되고 상식화되면 사람들은 당연하게 느낄 것이다. 그 안에서 개인의 자유나 인권은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 합의로 사람들은 스스로 괴물이 될 수 있다. 스스로 역겨운 괴물이라는 것을 절대로 알아차릴 일 없이 온전한 괴물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보편적 가치라는 것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모든 보편적 가치들도 한 시대를 뛰어 넘어 본다면 미개하고 야만스러운 것들이 분명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잠이 안 올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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