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야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세 모녀 - 궁금한 이야기 Y죽어서야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세 모녀 - 궁금한 이야기 Y

Posted at 2014. 3. 15. 12:55 | Posted in 리뷰/TV

 얼마 전 세 모녀가 같이 떠났다. 이 사건은 공중파 3사는 물론 인터넷 커뮤니티까지 전해지며, 많은 사람의 동정과 연민을 자아냈다. 3사의 탐사프로그램 중 분명히 이 사건을 들추어 시청률에 보태려는 방송이 있을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 방송은 궁금한 이야기 Y 였다. 물론 이전의 많은 뉴스도 이 사실을 보도했다. 하지만 한 꼭지일 뿐 몇십 분을 할애하진 않았다. 언론 보도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그나마 정치적인 사안이 없으니 있는 그대로 보도하지 않았을까? 궁금한 이야기 Y는 작정이라도 한 듯 최대한 슬프게 만들려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프로그램 특유의 이미지랄까 비디오 효과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궁금한 이야기 Y 가 나쁘다거나 폐지해야 한다거나 싫다는 것은 아니다.



 살아 생전 관심도 못 받고 죽은 지 6일 만에야 죽었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 관심이 없던 세 모녀에게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켜주는 것에 대해 그걸로 시청률을 올리든 광고료를 올리든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IMF 때부터였을까? 아니 그 이전부터도 서민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하루 혹은 한 달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그런 사람들의 삶에 대한 포기도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이 그 상황들과는 다르게 많은 관심을 얻는 것은 죽기 전에 마지막 월세를 냈다는 것이다. 이 땅에 많은 월세 세입자들은 그걸 보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난 억장이 무너졌다. 흔히 베풀지 않아도 될 혹은 실행하지 않아도 될 선행이나 일을 하는 사람을 넷 상에는 '선비'라고도 부른다. 어차피 죽을 목숨 이번 달 방값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방값마저 챙긴 세 모녀를 그저 선비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저 양심을 지켰다고, 자존심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난 그 방값의 의미가 무엇인지 딱잘라 말할 수 없었다. 



 살아있을 때 지금과 같은 관심을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왜 그들은 죽어서야 이런 지대한 관심을 받게 되었을까? 왜 죽고 나니 관청이든, 국회의원이든, 대통령이든 높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말하는 걸까? 이들이 죽은 시기는 한창 김연아 선수가 마지막 올림픽 무대를 치르던 시기였다. 난 아직도 기억한다. 김연아 선수와 악수 한 번 하고 같이 밥을 먹고 웃음을 짓던 정치인의 모습을.. 다른 일들이 산적해 있고, 처리해야 할 일도 많은 걸까? 이 일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으며, 굳이 인터뷰하면 참 슬프고 통탄할 일이라며, 복지 대책을 다시 잘 세워 앞으로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며 자신을 뽑아달라고 할 것은 뻔하디 뻔하다. 정치인은 어떤 식으로든 결국 모든 대화의 귀결은 표에 이른다. 그것이 어떤 불쌍한 서민의 죽음이라고 해도 말이다.


 사람은 당해봐야 안다. 어떤 일이든 어떤 상황이든 자신이 그 상황에 직접 처해봐야 그 절실함과 처절함을 익힐 수 있다. 꼭 정치인이 아닌 같은 서민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집 한 채 있는 가계 하나 있는 서민과 몸뚱이 하나 있는 서민은 다르다. 그들끼리도 서로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은 그 사람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관심을 가져야한다. 적어도 죽기 전에.



 번개탄을 사고 창문을 청테이프로 막으며 모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제 쉴 수 있다는 생각? 하늘에 있는 아버지를 만난다는 생각? 주옥같은 세상 이제 안 봐도 된다는 생각? 난 그들의 생각을 헤아릴 수 없다. 



 세 모녀가 살던 집의 주인과 인터뷰를 한다. 세 모녀는 어땠고 저쨋고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던 방송관계자가 집주인의 무릎을 다독거려준다. 난 이 장면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왜 집주인을 다독거리는 거지? 슬픈 이야기를 해서? 내가 오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슬픈 사건의 주변 인물들에게 위로 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 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슬픈 사건의 피해자는 딱 3명 뿐이다. 저분은 그냥 자신이 슬플 뿐 피해자가 아니다. 저 다독거림의 정체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아닐 것이다.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라는 글귀에 절절함이 묻어 있다. 말을 시작할 때 한번 끝맺을 때 한번 죄송하다고 한다. 무슨 반성문 같다. 주인아주머니에게 그간 밀린 집세가 없었다고 한다. 꼬박꼬박 넣어줬다고 한다. 게다가 떠나는 순간까지 집세를 냈다. 그런데 무엇이 죄송했을까? 주인아주머니라는 사람은 세 모녀에게 거처를 제공하고 월세를 받는다. 월세를 못 주었으면 죄송하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월세를 주었다. 저 죄송하다는 말은 자신의 죽음으로 살림의 정리와 시신의 정리 그리고 발견했을 때의 놀람에 대해 죄송함일까?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죄송함? 아니면 자신들이 죽음으로 집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에 대해 죄송함일까? 그것도 아니면, 아무 걱정 없이 월세로 사는 사람들에게 자기 죽음을 보여 심장에 무리가 가게 해서 죄송하다는 걸까? 이 한 장의 편지로 우리나라 많은 차상위의 가려진 차상위 계층의 마음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궁금한 이야기 Y는 정말 궁금한 것을 못 참는 거 같다. 장난꾸러기 개구장이 같다. 그래서였을까? 세 모녀가 죽음에 사용한 물건을 파는 곳에 가서 인터뷰 한다. 그 사람이 무슨 죄일까? 연관이 아예 없다고는 말 못 한다. 까짓것 인터뷰할 수도 있고 그거 팔았다고 가책 느끼며 한 번 울어주면 더 슬픈 분위기를 연출 할수도 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죽음에 사용된 물건을 보여 준걸까? 약 3~5초간이었지만 분명히 이 집에서 팔았고, 그걸로 세 모녀가 죽었다는 물건을 비춰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걸까? 요즘은 거의 도시가스를 쓰고 드문드문 기름보일러를 쓴다. 때문에 그것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모르는 사람 많다. 중학생 아래로 거의 모르고 대학생들도 모르는 사람 많다. 궁금한 이야기 Y는 15세 이용가 아니던가? 그러면 15세 이상은 이걸 봐도 괜찮다는 건가? 


 진심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물건이 어떤 물건인지 15세 이상만 되면 보여줘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방송했는지 궁금했다. 그 물건을 보여준 것은 이런 슬프고 궁금한 이야기가 세상에 더 많아졌으면 하는 걸까? 그래서 소재가 더 많아지고 취재거리가 더 많아지는 행복한 세상을 원하는 것일까? 난 확대 해석하고 있다. 방송의 여파라는 것은 항상 확대적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티비에서 보고 그랬어요." 라고 말하는 어린이나 청소년이 없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생계를 꾸리던 엄마의 팔이 골절되었다. 가게에선 산재 처리해서 수술해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걸 거절한다. 수술해봤자 일을 못 한다는 것이었다. 그 절망의 깊이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정도도 못 이겨내서 어떻게 하느냐 혹은 살 생각을 해야지 라고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일까  절망은 서민들 사이에선 이미 감내해야 하는 사회생활 일부가 된지 오래다. 그 정도 절망 없는 사람 없다며. 긍정적으로 이겨내라고 헛소리나 안하면 다행이다. 갑자기 예전 걸그룹 발언이 생각난다. "의지가 부족하면.." 



 사람들은 흔히 요즘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한다. 다들 힘들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힘듦에 있어 단계가 있고 서로 느끼는 힘듦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은 간과된다. 어떤 사람은 오늘내일하며 죽을 날짜를 셀 정도로 힘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손가락 까딱하여 자기 안에 피가 도는 것이 힘들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다섯 시간 자며 온갖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에 시달리며 힘들다. 어떤 사람은 하루에 10시간씩 자며 어떠한 노동도 하지 않지만, 노동을 하는 사람보다 곱절을 더 번다. 그 곱절로 번 돈을 헤아리느라 힘들다. 



 태어날 때부터 죄를 짊어지는 사람들 그 이름은 서민


 없는 살림에 사랑이라는 알량한 감정 하나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기에 우리 사회는 너무도 힘든 곳이다. 못 배운 게 죄이고, 없는 것이 죄이다. 없는 살림에 빚을 지는 것도 죄이고, 그렇게 살다가 힘들어 스스로 죽는 것도 죄이다. 그들이 그렇게 죄로 점철되는 삶을 살고 거기서 멀지 않는 곳에서의 사람들은 언제나 떳떳하고 선량한 우리 주위에 이웃들과 내가 아닌가? 그 이웃들은 날 풀리면 등산도 다니고, 철마다 여행도 다니지 않는가? 그러다 이런 방송을 보고 한 번 울거나 무관심하듯 지나치지 않는가?


 어떤 사람들은 죄송하다며, 죄송하다며 죽어가도 그렇게 죄송해했던 사람들의 한 끼 감동을 위해 죽어서도 소비된다. 



 내가 대통령만 되면 다 하겠다던 사람이 있었다. 나를 아주 떨어뜨리려고 작정하고 나왔느냐던 대찬 후보가 있었다. 내 꿈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후보가 있었다. 그 사람이 지금은 정말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그녀가 만드는 내꿈이 이루어지는 세상에 세 모녀는 포함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의 꿈은커녕 생존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세 명이든 삼십 명이든 그들이 한꺼번에 같이 죽는다고 해서 저 사람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저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처럼 죄도 없는 사람 가두고 고문하고 사법살인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 사건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안타까움에는 2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왜 내가 진작 몰랐을까? 알았다면 도와주었을 텐데 같은 동정의 안타까움이고, 두 번째는 왜 기존의 사회안전망 그러니까 동사무소에 상담을 받아 복지 혜택을 받지 않았을까? 라는 안타까움이다. 확실히 말해 첫 번째는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이고, 두 번째는 정말 자기 중심적 생각이다. 있는 서비스 혹은 복지는 사용하라고 있는 것 아닐까? 그들은 왜 그런 복지의 혜택을 누르지 않고 죽었느냐는 게 왜 자기 중심적이라는 걸까? '사람이 죽는다.' 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내가 죽는 게 아니고 남이 죽기는 쉽다. 그래서 그들의 죽음을 우리는 너무 쉽게 보는 것이다. 그 죽음의 무게가 삶의 무게보다 훨씬 가벼워지기까지 그들은 얼마나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을까? 그 무게를 짊어진 적 없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고 자신 나름대로 해결책을 낸다는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을 먹으면 돼죠?' 라고 말했던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수급이 아니다. 지금 같은 관심이었다. 하지만 그 관심은 죽은 후에 나타났고, 죽은 후에 취재가 되었으며, 죽은 후에 상품이 되어 방송되었다. 단언컨대 그들이 죽지 않았다면 이만큼 회자되지 못 했을 것이다. 궁금한 이야기 Y의 흥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죽은 가족들에 대한 관심이 이미 다 깨진 접시임에도 사람들이 많이 봤으면 한다. 죽어서까지 관심을 못 받으면 그 사람들이 너무 슬플거같다. 궁금한 이야기 Y에서 썻던 문구가 생각난다. '하늘 나라 이사가서는 행복하길' 같은 헛소리보다 아직 죽지 못해 사는 많은 사람들과 마지막 월세를 마련하려는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맛나게 해줘야 됨을 촉구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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