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 리얼 버라이어티의 큰 실수 '자막'베이비 리얼 버라이어티의 큰 실수 '자막'

Posted at 2014. 3. 12. 08:17 | Posted in 리뷰/TV

 시대가 아파하고, 사람들이 모두 힘들다 말한다. 어떤 날은 세 명의 모녀가 생활고를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늙은이가 홀로 누워 죽어있기도 했다. 아빠와 아들이 동반투신한다. 거의 모든 집이 도시가스를 쓸 거 같은 동네에서 갑자기 번개탄 수요가 늘어나기도 하고, 아직 꽃샘추위가 한창인데도 새벽녘 한강 어귀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이 있다. "죽을 용기로 살아라!", "죽을 각오면 무엇을 못하랴?", "죽지 못해사는사람이 많다." 라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 궤변을 늘어놓은 사람들도 결국엔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내가 너무 어두운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걸까? 내가 인간관계가 너무 좁아 요즘 "아주 살맛 난다. 이 좋은 세상 눈물 나게 감사한다." 라는 사람을 못 본 탓일까? 그런 사람들이 대한민국, 이 땅에 있긴 있는 걸까? 아주 없다고는 말 못 하지만, 적어도 서민이라는 굴레에 박혀있는 사람 중 그런 사람은 0.001% 정도일 것이다. 노인은 쓸쓸하며, 가난했고, 어른은 고달프고, 가난했다. 청년은 불안하고, 가난했고, 청소년은 피곤했고, 가난했다. 이른바 서민들은 다 이렇지 않나?



 아기는 그렇지 않다. 아기는 원래부터 가난하지 않다. 그저 조금 못한 환경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별 상관없어 보이는 아기의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떤 아이와 같다. 아기는 모두 용서받는다. 실수해도 용서받고, 잘못해도 용서받는다.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서 들어주고, 최소한의 몸짓과 표정으로 사랑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생존을 보장받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결코 모든 아기가 그렇다고는 못한다. 무관심하거나, 비정의 부모를 만나거나, 쾌락에 젖어 잉태된 아이라면 세상 빛 보기 전에 사지절단 당하는 게 일반적인 세상이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그런 아이들보다 아빠 어디가의 맑고 순수한 아이들이나 슈퍼맨이 돌아왔다. 의 귀엽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얼굴만 떠오른다. 우리는 단체로 최면에 걸린 것은 아닐까? 우리 주위에 많고 많은 아이가 아닌 그 소수의 아이로 아이들을 이해하고 있진 않은가? 다 그 아이들 같을 거라고, 아니면 다 그 아이들처럼 행복할거라고.


  세상 온갖 때와 피곤함에 쩔은 사람들이 주말 집에 앉아 티비를 본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순수한 드립을 난사한다. 그것이 예능작가가 쓴 말이든, 진짜 아이가 한 말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아이의 말실수 하나가 엄청난 이슈가 되기도 하고, 아직 사회에 적응이 하나도 안 되었지만, 그마저도 모자라다 보다는 순수하고 코믹적인 요소로 부각된다. 아이의 인기를 등에 업은 아빠도 덩달아 인기가 올라간다. 난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순수함도 방송사엔 그저 시청률의 매개 밖에 안됐지만, 머 어떤가. 시청자들 보기에 아빠 미소, 엄마 미소 짓게 하여 시청하게 하면 방송사 좋고, 출연해서 CF 들어와 살림에 이바지하면 출연자들에게도 좋고, 세상사에 지친 심신을 이끌고 티비에 넋 놓고 있는 시청자들 미소 짓게 해서 좋은 거 아닌가?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그 아이들이 카메라가 없을 때 와 있을 때의 생활이 180도 다르더라도, 그건 이미 시청자와는 관계없고, 카메라 있을 때는 항상 행복해 보이니까 상관없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좋은 건 좋은 것이다.


 항상 그런 것을 인지하고 그냥 재미로 보려고 하지만, 눈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자막이다. 진짜 망할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자막이다. 어떻게 저런 비인간적이고, 배금적이며, 유치하고, 독재적이며, 어이없는 시스템이 마치 약방의 감초처럼 방송에 나오는지 그 이유는 잘 알고 있다. 센스있는 폰트와 빠른 상황전달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방송의 제작자들이 만든 길을 따라가게 만드는 장치로써 순간적인 자막은 그 효과가 엄청나다. 현재 방송하는 모든 예능에는 자막이 들어간다. 우리말로 하는데도 방송 대부분은 자막으로 채워진다. 몸짓 손짓 발짓 동작 하나하나에도 자막이 들어간다. 그것은 방송 제작의 스킬이라고 생각한다. 시청자가 피곤하든 말든 일단 재밌는 방송의 길을 만들고 시청자를 질질 끌고 오는 것도 하나의 스킬이다. 그것도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하지만 그 재미로 가는 길을 포장하는 자막이 어느새 신이 되어 시청자를 몰아넣다. 바로 아이를 이용한 리얼버라이어티들이다. 


 아이들도 생각한다. 나름의 사상이 있고, 생활 패턴이 존재하며 숭배하는 것과 멸시하는 것이 존재한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도 분명하며, 나름 생존을 신경 쓰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어른의 세계의 그것들과는 다르다. 아이들이 방송에 나와 그것들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자막이 그것을 빠르게 전달했다면, 아예 이런 생각을 안 했겠지만, 자막은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된 양 아이들의 생각을 대신 말하고, 아이들의 행동을 대신 지시했으며, 아이들의 미래까지 예언하고 자빠졌었다. 자막은 아이와 아이 간의 우정이나 사랑을 예시하여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 어린아이들 사이에도 한국 드라마 전형의 어디에도 사랑은 존재한다는 말도 안 되는 싸구려 로맨스를 만들려고 하였다. 어떻게든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만 붙여놓으면 둘이 결혼이라도 하게 만들려고 안달이 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방송의 방향과 생각을 읽는데 있어 자막은 너무나 노골적으로 그 방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이해가 안 된 것은 아이의 행동을 자막으로 정의하는 것 이었다.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꿈보다 해몽이라지만, 이건 너무 한 것이 아닌가? 그 아이의 진심 어린 행동이 방송 자막으로 인해 다른 뜻으로 매도되었을 때, 부모는 유명해져서 좋고, 방송사는 시청률 올라가서 좋고, 시청자는 힐링받아서 좋다. 하지만 아이는


 2~3살짜리 아이가 옹알이하거나 울거나 웃거나 바둥거리는 것을 그저 보기 좋게 듣기 좋게 아이의 생각은 전혀 상관없는 말들로 자막을 입히는 것을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보기 좋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를 아이, 설사 커서 이 방송을 다시 보더라도 내가 저 때 저랬었나? 할 아이의 생각 따위 도무지 중요한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때는 짝짓기가 유행했었다. 예쁘고 잘생긴 남녀가 나와 여자는 섹시 댄스를 추고, 남자도 매력을 발산했다. 결국엔 남녀의 선택에 따라 커플이 된다. 방송이 끝날 때쯤엔 사람들은 그 둘이 진짜 커플이 된 거 같은 환상에 사로잡힌다. 가짜로 결혼 생활을 하기도 하고, 유치하지만 일단 하면 집중하게 되는 재밌는 장난들을 이어붙인 게임을 하루 종일 하기도 한다. 이 일련의 버라이어티들은 모두 출연자의 동의를 받는다. 출연자는 자신의 생각이든 작가나 PD의 생각이든 그것에 따르는 것이 하나의 계약 의무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백번 양보해서 이제 초등학교 입학하는 아이들까진 설명이 가능할 수도 있다. "너희 부모가 허락했다. 너의 모든 행동과 말을 우리가 지정할 수 있고, 그로 우리는 시청률을 올려 돈을 번다. 너희에게도 그 돈을 조금 나눠준다." 이런 설명이 과연 1~5세까지 아이들에게 가능할까? 설명이 가능하다고 해서 아이들이 수긍할까? 티비에서 아이의 행동에 자막을 넣는다. 옹알이를 하는 아이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부모가 허락했다는 이유로 시청률에 이용당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보며 힐링을 느끼든 엄빠미소를 짓든 그 매개의 자막은 우리를 향할 뿐 아이를 향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아이들의 순수함이 장사 거리다. 라는 게 맘에 안 드는 것이 아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살림하나 보탤 수 있다면 사용해도 닳지 않는 아이들의 웃음 따위 오히려 제1 순위 매도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아이 본인의 동의가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아이의 생존을 책임지는 부모의 허락으로 된 것이 아니냐는 소리를 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현행법상 우리나라 아동의 경우 거의 모든 권리는 부모가 대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생각을 마음대로 날조하는 것에 부모가 동의했는데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의 의중을 왜 따지냐는 것이다. 그런 식의 거래는 찬란하고 눈부셔서 다시는 돌아보기 싫은 독재시대가 떠오르게 한다. 언론 조작해서 마음대로 사람들이 보게하고 싶은 것만 보게 끔 만드는 것, 그 사건의 중심의 사람들의 의중은 묻지 않는 것, 어차피 국가가 있기에 그 사람들이 있는 것 생존을 책임지며, 모든 권리는 독재자와 독재정부로부터 나와 국민을 대행할 수 있으므로 깡그리 무시되는 의견들. 


 아이들의 행동이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재밌게 풀어쓰는 것은 대환영이다. 억지스러운 상활설정을 기반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실로 예견이나, 희망을 말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있지도 않은 생각이나 제작자가 원하는 생각을 집어 넣어 시청률을 타켓팅하는 것은 독재자, 비인권주의자, 나쁜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