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 - 최진석 교수 Who am I 리뷰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 - 최진석 교수 Who am I 리뷰

Posted at 2014. 3. 6. 15:25 | Posted in 리뷰/TV

 

 자기 자신은 온전히 그 주인인가? 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혹은 하려는 일을 결정하니까 내가 자신의 주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들의 기준은 어디서 왔는가 생각해보면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욕망하는대 로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음을 직감할 수 있다. 


 사람은 저마다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이 밖에서 왔느냐 아니면 내적 자발성에 의한 것이냐는 굉장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사람은 남의 기준 그것도 아주 오래되고 검증되지 않고 많은 사람이 실패하는 기준을 자신의 기준으로 가지고 있다. 


 자신의 기준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질문할 때도 잘 나타난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원래 질문은 몰라서 하는 것인데도 왜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확인시켜 당위성을 갖는 것이다. 



 국가도 기준을 만드는 국가가 있고 그 기준에 따르는 국가가 있다. 한국은 기준을 따르는 국가이다. 김정룡이라는 의학박사가 있다. 세계 최초 B형 간염 백신을 개발하였으나 상용화는 세계에서 3번째로 되었다. 한국 보건사회부에서 인증기준이 없어 인증을 못 받은 것이다. 후에 미국과 프랑스에서 기준이 생긴 후에야 그 기준에 맞춰 상용화가 되었다. 국가도 기준을 창조하는 것보다 따라가는 것에 더 습관이 들어서 그렇다. 모든 기준에는 처음이 있다. 기준을 외부에 두는 사람은 기준의 생산자가 되길 두려워한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주인이란, 기준의 수행자가 아닌 생산자가 되는 것이다. 기준은 항상 외부에서 우릴 지배한다. 보편성과 객관성으로 무장한 기준은 엄청난 힘을 가진다. 그래서 기준을 밖에서 가져온 사람들은 항상 조심스럽다. 그 기준이 바뀌거나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준을 자발적으로 만드는 사람은 두렵지 않다. 자신이 만들고 선택한 것이기에 틀릴 일이 없다. 바뀔 일도 없다. 



 자신의 기준이 아닌 밖의 기준으로 사라는 사람은 얼마나 불행한가? 우리나라는 약 12년을 밖의 기준으로 얽매는 교육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기준에서 부합해서 뛰어난 사람은 칭찬을 받고 좋은 미래를 보장받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배척당하고 소외당한다. 우리 사회 스스로 밖의 기준을 자신의 기준으로 삼게 하고 있다. 가정에서도 그 아이의 자발적인 기준이나 욕망보다는 사회의 기준을 내재시킨다. 그렇게 자신의 주인이 아닌 노예가 된 사람들은 행복할 수가 없다. 예능을 보고 웃고, 스포츠를 보고 환희를 얻겠지만, 빈 깡통에 조약돌 굴러가는 공허함만 가득하지 않을까?


 보편적인 기준 이념에 견주어 보면 세상 모든 사람은 부족하고, 죄인이고, 결함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기준을 가져야 한다. 



 이 세상에는 사건이 존재하는가 이론이 존재하는가? 생각해보면 이론은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모두 사건뿐이다. 이론은 사건이 존재함으로써 정리되거나 정립되는 것이다. 이런 이론들은 사건을 예측하거나 평가할 때 사용되지만, 현재 많은 사람은 사건이 아닌 이론을 진리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다이어트에 대한 이론을 고민한다. 그것은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아니다. 다이어트를 한다는 것은 내가 실행하고 참여하는 것이지, 다이어트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다이어트를 하는 것이 아니다.



 회사들도 혁신에 대해 고민을 한다. 하지만 혁신에 대한 고민하는 것이 혁신하는 것은 아니다. 혁신을 강조한다. 혁신에 관해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강의를 듣는다. 하지만 그것은 혁신이 아니라 혁신을 공부하는 것이다. 혁신을 공부하는 것은 혁신이 아니다. 혁신한다는 것은 내가 혁신에 참여하는 것이다. 


 공부도 마찬가지 아닐까? 공부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들 공부법을 쫓는 사람들은 공부 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에 대해 공부를 하는 것이다. 공부는 자기 자신이 참여할 때 공부가 되는 것이다. 


 자기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나만의 고유한 활동성 욕망, 나만의 힘에 대해 정면으로 마주 보고 일상에서 사건으로 발동시킬 수 있느냐 아닐까?


장자 - 나는 차라리 진흙탕 속에서 스스로 즐기는 삶을 택하지 천하에 얽매이는 삶은 택하지 않겠다. 


양주 - 내 정강이 털을 한 올 뽑아 천하가 이롭다 하더라도 난 뽑지 않겠다. 


 양주의 말을 되새겨보면 이기적이네?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자발적 생명력이 없는 사회를 원하지 않기 때문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개개인의 자발적인 생명력이 없는 채 형성된 사회는 존재의의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찬란한 민주화 운동의 주력인 학생운동의 역사는 강력하다. 학생 운동을 주도하던 학생들은 저마다 정의와 도덕으로 무장했다. 하지만 그 학생들이 학생운동을 마치고 사회로 진출했을 때, 사회는 그만큼 정의로워졌는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변화했는가? 라고 물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혁명하는 개별자들이 혁명이 되지 않은 채 혁명을 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공감하는 혁명 이념과 이론을 수용한 것뿐이다. 그 이론이 우리가 좋게 보는 정의감과 도덕성이었을 뿐이고 그렇다면 지금의 학생운동은 스펙과 성적 만능이라는 이론을 수용한 형태로 봐도 되는 것 아닐까? 


 자발성, 독립성, 주체성은 그 사회의 진정한 변혁과 발전과 품격을 만드는 기원이 된다.


자쾌(自快) - 스스로 즐기는 것의 동의어는 자유이다. 전체애에 대항하는 활동이 자유는 아니다. 자발적 생명력이 내적인 활동을 근원으로 삶을 끌고가는 것이 자유라고 최진석 교수는 말했다. 내적인 활동이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욕망이라는 것으로 생각된다. 자신의 욕망대로 삶을 끌고간다. 라는 말을 들으니 불안하고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 역시도 세사의 기준에 너무나도 딱 맞춰진 사람이라는 증거일까?


 일상은 끊임없이 운동한다. 하지만 이념과 이론은 정지해있다. 세계는 단 1초도 정지한 적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정지해 있는 이념이나 이론에 자신의 세계를 맞추려고한다. 모든 삶 속의 활동들은 운동의 즉 움직임이 있는 형식임에도 우리는 정지한 것을 신봉한다. 움직이는 일상은 항상 유동적이다. 하지만 이념과 이론은 한쪽만을 이야기한다. 대립적 포용이 없는 것이다. 이 하나의 가치에 집중된 이념과 이론을 사람들은 신봉하고 믿으며 수행한다. 믿어야 수행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 믿음의 끝에는 경직된 자신이 있을 것이다. 가치 기준을 생산하지 않고 항상 수용하는 존재의 가치는 그 이념과 이론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로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계와 관계할 때 내가 생산한 기준으로 관계하는가? 이미 학습된 기준으로 관계하는가? 난 이 질문에 한참이나 고민해야 했다. 내가 그럴까? 아닐까? 를 고민한 것이 아니라. 과연 몇 사람이나 자신의 기준을 생산한 사람이 있을까? 궁금해서였다. 


 우리 대부분은 윤리적이고 주체적으로 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보편적 이념이 내면화된 것을 자기 기준으로 착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며 어떤 강의에서도 아줌마들이 고개를 까딱까딱 거리는 것을 매우 혐오하는 내가 고개를 까딱거리게 하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윤리와 주체적인 삶은 어쩌면 보편적 이념이 내재된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은 매우 합당하다. 아니 맞을 것이다. 그것이 왜 윤리적인데? 물어보면 사람들은 그것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윤리니까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생각한 윤리가 아니다. 그저 사회적으로 보편화된 윤리일 뿐이다. 사람들이 난 윤리적이야 하면서 수해나 재해에 성금을 내는 사람들은 그것이 윤리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돈은 몇%의 수수료를 전혀 상관없는 회사에 남기고 일부분이 재해 지역으로 갈 것이다. 가서 지폐의 형태로 도움을 줄지 아니면 얼마의 차익을 남긴 회사의 생필품으로 도움을 줄지는 알 바 아니다. 그저 그것이 보편적으로 윤리적이고 합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회의 보편적 이념일 뿐이다. 자기 자신 스스로 그것이 윤리적이라고 생각해서 한 일이 아니라는 소리다.



 우리의 내재적 기준은 우리를 표현하기 위함이다. 나를 표현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배움이다. 우리나라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공부를 강조한다. 하지만 배움이란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표현을 습득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잘된 케이스나 잘되게 만드는 이론을 습득하는 것은 내가 잘되는 것이나 잘하는 것이 아니다. 배우는 것은 나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지 자기 위로의 장치나 남의 기준에 자신을 맞춰 심리적 안정감을 얻으려는 도구가 아니다. 평생교육? 교육의 목적은 교육을 받기 위함이 아니지 않은가.



 나를 침해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저항 해야한다. 의 주체나 존재, 존엄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한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사회에서 우리는 필요에 따라 존재를 지우기도 하고 존엄을 쓰레기통에 분리수거 하기도 한다. 그 순간순간 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욕망에 의한 기준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집단의 기준에 맞추는 인간이 된다. 아니 부품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정리하는 나 자신도 부품이 되지 말자! 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분명 퍽퍽한 부분은 존재할 것이다. 철학과 일상의 괴리를 또 한 번 느끼기도 한다. 회사에서 온 종일 깨지는 사원은 자신의 욕망이나 기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참고 있음에 그의 존엄은 이미 소각되고 있을지라도 그 빈자리에 돈의 존엄의 올려 자신의 미래를 안정되게 하려는 것을 난 탓할 수 없다. 


 내가 나의 주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충고이다. 내가 남에게 하는 충고 혹은 내가 남에게 듣는 충고 모두 방해요소이다. "내가 알아서 할게" 라고 말하는 최진석 교수를 보며 약간의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억눌려있고 충고와 조언으로 얼룩진 나의 존엄과 일그러진 나의 욕망을 회복시킬 수단을 보여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할게"가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항상 자신의 밖에 이미 있는 기준에 견주어 자신을 보면 결코 자기를 사랑할 수 없다. 자신이 보잘것없어지고 나빠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 보편 이념들은 이미 지니간 찌꺼기이다. 거기에 자신을 맞추면서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다. 그 기준에 안 맞춰도 우리는 생존할 수 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온전한 주인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나 이성에 묶여 있기도 하고 실체가 없는 이념이나 사상에 묶이기도 한다. 성취감이나 우월감에 노예일 수도 있고, 허영이나 거짓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 이런 시대라서 우리는 더욱 자신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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