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행복한 노인들을 보며 느끼는 한국의 노인복지스웨덴의 행복한 노인들을 보며 느끼는 한국의 노인복지

Posted at 2014. 3. 1. 20:43 | Posted in 리뷰/TV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하지만 노인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는 아마 모두가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아기도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 그래서 노인이 행복한 나라는 모두가 행복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스웨덴의 잘 정비된 복지는 그간 많은 언론을 통해 소개되었다. 많은 국가들이 스웨덴과 같은 복지국가를 꿈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많은 나라의 국민들이 꿈꾸는 것이다. 국가 자체를 통솔하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복지 국가를 원하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복지가 무엇인가? 왜 필요한가? 어떻게 해야 복지가 잘 되는가? 같은 원론적이고 학구적인 물음보다는 쉽게 '살만하게끔 만들어주는 것' 이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우리나라는 어떤가? 복지? 그건 우리나라에서 먹는건가? 입는건가?  



 노인의 행복에 대해 가끔 크나큰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노인의 행복을 마치 과거의 영예를 떠올리며 웃고 있는 추억팔이로 생각하거나 노인 그 자신이 아닌 자식이나 손자를 보며 느끼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노인도 한 명의 인간이다. 분명 그 자신을 기초로 한 행복이 존재한다. 다만, 그런 호사스런 행복을 누리는 노인이 우리나라에는 별로 없다. 여러 이유 중에 낮은 경제수준이 첫번째 이유일 것이다. 


 사람의 수준은 그가 이룬 것들로 인해 나타난다. 당장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은 생존의 영역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한다. 인격이나 윤리관 또한 딱 거기에 알맞게 머무른다. 우리나라 노인들의 수준은 완전하게 양극화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한 쪽에선 넘치는 유산으로 자식들이 물고 뜯거나 오직 그의 돈을 보고 움직이는 피라냐 때 들만 득실거릴 것이다. 그래도 반대편 보다는 이 쪽이 훨씬 낫다. 반대편은 하루 요구르트 한병으로 끼니를 때우며 굉장히 무거운 폐지들을 줏어나른다. 어찌 되었건 모두 행복해 보이진 않는다. 그들에겐 여유가 없거나 생존 수단이 없다. 



 스웨덴의 노인들은 다르다. 그들은 스스로의 행복을 자아에 대한 반응으로 생각할 줄 알며, 적어도 생존에 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가정에 한 명의 치매노인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끔직하지 않는가? 그 노인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며, 실제로 많은 치매 노인들이 버려지고 있다. 그들은 어떻게 될까? 보호소에 갈까? 거기에서의 생활은 안봐도 뻔하다. 하지만 스웨덴은 치매환자더라도 스스로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만큼의 장치가 있다. 그래서 설사 가정에서 치매환자가 있더라도 경제적 위기를 겪는다거나 환자로 인한 부담이 거의 없다. 치매 환자 한명 제대로 보필하려면 엄청난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되는 우리나라와는 딴판이다. 



이런 스웨덴의 복지 기초는 바로 연금제도이다. 우리 나라에서 실행하고 있는 국민연금과는 질적 양적으로 모두 틀리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되는 것은 기초연금이라고 생각한다. 최저보장연금(Guarantee pension) 이라고 하는 제도는 소득이 낮거나 전혀 소득이 없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한다. 


 스웨덴은 GDP의 34% 정도를 복지에 지출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절반이 노인복지에 관해 지출된다. 노인이 되어 근력이 떨어지고 몸이 안좋아도 노후에 대한 걱정이 없다. 사람들은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국민소득은 세계 상위권이 되었다.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욕심을 국가 정책으로 상쇄시킨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스웨덴은 엄청나게 높은 세금을 요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한 불만이 없다. 노인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고, 젊은이들은 그런 노인들을 보며 자신의 노후를 여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과 노후에 대한 걱정없이 결혼할 수 있고, 출산할 수 있다. 그래서 국가 경쟁력이 올라간다. 



 우리나라 미디어에서 노인을 다룰 때는 몇가지 패턴 밖에 없다. 그 노인으로 하여금 시청자에게 힐링감을 주는 것이다. 노인이 과거를 회상한다거나, 노인다운 자비와 지혜를 보일 때 우리는 감동하고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그냥 방송작가의 노림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노인은 힐링의 대상이 아니다. 노인은 보호해야 될 우리 자신의 미래 모습일 수도 있다. 


 노인의 생활 영위가 어려운 것은 높은 확률로 발생하는 의료비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의료보험제도는 굉장히 잘 되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험의 사각지대의 질병이 걸리면 집안이 풍비박산 난다고 한다. 스웨덴은 연금을 기반으로한 보험제도로 노인은 거의 부담이 없는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한다. 


 젊은 사람들은 늙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많은 세금을 부담했으니 돌려받을 차례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을 생각하면 씁슬한 미소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스웨덴은 정치적으로 무려 44년간 사민당의 집권하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수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는데 그 후에도 스웨덴의 복지체제는 변하지 않는다. 스웨덴의 복지는 거의 세금 즉 국비로 충당된다. 스웨덴 사람들은 삶에서 그들이 부담하는 높은 세금을 안정된 생활로 돌려받는 것이다. 어느 나라처럼 원하지도 않는 강바닥 파서 토목공사하는데 쓰이지 않는다.




 스웨덴의 29대 총리인 페르 알빈 한손은 사회민주노동당 출신이다. 우리나라에서 사회민주노동당이라는 당명으로 선거에 나갔으면 아마 감옥에 가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는 가난한 노동자의 집에서 태어난 말 그대로 서민이었다.우리나라에도 '내가 다 해봤다' 던 대통령이 있었으나, 페르 알빈 한손은 정말 자기가 다 해봤다. 그는 노동자의 번민과 기쁨과 바람을 알고 있었다. 그가 피력한 구호는 '국민의 집' 이다 너무나 유명한 이 말은 지금의 스웨덴을 존재하게 한 말이다. 


<국민의 집 - 나라는 모든 국민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집’이 되어야 한다.>


1930년대 스웨덴은 사회적으로 너무나 불안정했다. 노동자들의 잦은 파업과 2차세계대전까지 겹쳐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평등을 기초로 한 복지정책을 펴나가며 이를 타개했다. 그리고 현재는 소득 6만불의 경제 대국이자, 복지 대국이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평등' 이라는 이념이다. 그냥 상상이지만 우리나라에서 평등 이라는 이념을 꺼내면 어떻게 될까? 분명 평등이란 단어는 나쁜 뜻도 아니며,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단어가 우리나라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그 단어로 사기를 치며 전쟁을 일으킨 북한이 있기 때문이다. 민족의 불운이 아닐 수 없다.



스웨덴의 노인복지 시스템은 오직 생존에 관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엄청난 수의 노인 연합과 취미활동조직들이 있다. 노인은 그것들을 즐길 여유를 국가로 부터 제공받는다. 그리고 행복을 느낀다. 


 하긴 스웨덴이 이랫네 저랫네 해봤자 나하고는 상관없는 제3세계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런 방송을 인용하며 포스팅하는 이유는 적어도 복지로 쌀과 떡과 행복이 나오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각인 시키기 위해서이다. 우리나라는 예능에서조차 '나만 아니면돼!' 라는 말이 유행한다. 나만 아니면 노년에 폐지를 줏으로 돌아다니다, 교통사고가 나도 상관없다. 나만 아니면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끔 보는 선의와 감동 일화들을 접하며 '아직은 그대로 살맛나는 세상' 같은 헛소리를 말한다. 정확히 우리나라는 '죽지 못해 사는 나라' 라는 걸 많은 지표들이 가르키고 있음에도 그렇다. 


출처 : 국민연금공단


 항상 큰 선거가 있을 때면 많은 후보자들이 한결같이 말한다. '복지' 라는 단어를 말한다. 그들에게 복지는 유권자에게 돌아갈 보은이 아닌 표를 얻기위한 사기 수단일 것이다. 그 수단은 영구하게 보관하려고 할 것이다. 세계10위권 경제대국에선 오늘도 월세를 못내서 세 모녀가 스스로 목숨을 끈는 일이 있었다. 80대 할아버지가 몸이 아파 일을 못해 아사 하는 사건도 있다. 


 노인 복지는 국가가 우리에게 보장하는 우리 미래에 대한 태도이다. 지금의 노인들도 득을 보지만 결국에 모든 노인이 될 사람들이 득을 보는 구조이다. 그래서 노인 복지가 잘되면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노인 복지의 핵심은 노인의 생존권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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