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약속이 지키지 않아도 될 약속인 이유또 하나의 약속이 지키지 않아도 될 약속인 이유

Posted at 2014. 2. 27. 23:18 | Posted in BLOG/시사사회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대기업 혹은 재벌이란 어떤 존재일까? 돈이 아주 많은 사람? 돈이 아주 많아서 좋은 것도 알고 그 많은 돈을 더 많은 돈으로 만들기 위해 조금의 돈으로 사람을 부리는 것도 이해가 간다. 나 또한 쭉 그런 상황들을 보며 익숙해졌고, 그것이 정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람 대 사람이 아닌 사람 대 고기 기계 혹은 기간제 노예 같은 형식은 아무렴 어떤가? 그저 우리는 그 돈 많은 사람이 큰 돈을 벌게 도와줌으로써 얻는 작은 돈을 위해 어떤 처지라도 불사한다. 난 그것이 절대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처지라도 불사르고자 우리는 약 12년의 공교육과 4년의 대학교육을 스스로 받지 않는가? 그 교육을 다 받은 후에도 많은 고난을 거쳐야만 큰 돈을 가진 사람을 위해 작은 돈을 받으며 일 할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지키지 않아도 될 약속


 자격은 어디까지나 그 자격을 가질 능력이 있는 다른 후보들보다 월등한 생산력을 어필할 때까지 유효하다. 그 자격의 자리가 굳이 당신일 필요는 없다. 당신 아니어도 된다. 우리는 이런 상실감 혹은 박탈감 같은 것은 기업의 시스템에게 서비스로 제공한다. 무료이다. 그것으로 스트레스를 받든 절망을 하건 간에 말이다. 여기까지도 나는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의례 사람이라는 것은 육신이 있고 정신이 있는데 정신과 육신을 모두 하나로 보아 인간이라고 하고 그 인간이 지닌 노동력을 회사는 계약이라는 조건으로 부리지 않는가? 하지만 확실히 해야 될 것은 회사의 이윤을 위해 정신이나 육신의 반영구적 손상은 없어야 한다. 부득이하게 손상이 있다고 할지라도 회사 내에서의 손상이라면 당연히 회사가 책임을 져야한다. 그것이 돈이 많더라도 인간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될 약속이다. 하지만 그들은 지키지 않았고 지금도 지킬 마음이 없어보인다. 지키지 않아도 될 약속이기에 그럴까? 



지키지 않아도 되게 하는 사람들


 돈 많은 사람들이 돈 적은 사람들에게 하는 약속을 한다. 하지만 그 약속들은 대부분 지켜지지 않는다. 오직 자비와 은총의 형태로 불현듯 제공될 뿐이다.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받는 수당을 제외하고 우리는 당연히 누려야 될 권리가 있다. 회사는 그것을 지켜야한다. 법이라는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노동력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그 울타리를 넘어 미친듯이 질주한다. 마치 극 세디스트적인 가축을 보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런 가축이나 그렇지 않고 띵가띵가 하는 가축이나 상관없이 어느정도 나이가 되거나 성과가 없는 가축은 가차없이 도축된다. 그리고 그 빈 자리에 다시 팔팔하고 어린 가축들이 들어온다. 


 그 가축들은 엄청난 경쟁력을 뚫고 이 도살장에 왔다. 자신이 자랑스럽고 눈물이 날 만큼 성취감과 전 인생에 걸친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이면에는 옆에 있는 많은 경쟁자들도 보이며, 높으신 선배님들도 보인다. 잘 보이고 싶다. 능력있어 보이고 싶다. 난 꼭 성공한 가축이 될꺼니까. 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서 도축되었던 가축들처럼 열정을 불태운다! 오직 돈 많은 사람의 새로운 돈을 위해서. 혹은 돈 많은 사람이 주는 아주 극히 일부의 돈을 위해서. 그런 가축들은 온 나라에 즐비하다. 가축이라기 보다 부품에 가깝다. 그 부품들의 대기표는 이미 대기표 자체가 동 날정도로 많은 수가 있다. 겉으로는 무슨 약속인들 못하랴, 하지만 실상은 어떤 약속이든 지키지 않아도 된다. 약속을 지키라며 항의하는 부품은 빼버리고 새 부품으로 교체한다. 그래도 약속을 지키는 것이 좋지 않냐고 생각하는 무리는 한번에 살처분하고 새로운 가축들을 들이면 그만이다. 왜냐하면 어떤 짓을 해도 그들의 도살장에 가고픈 많고 많은 가축들이 있고, 그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받지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물건을 항상 애용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이 망하면 마치 자기들이 같이 망하기라도 한다는 듯한 믿음까지 가지고 있다. 뉴욕 한 가운데 타임 스퀘어 전광판에 파란색 타원형에 익숙한 영어 단어가 보이면 우리나라가 대단해 보이고 그 나라에 속한 내가 자랑스럽지 않던가! '우리나라의 자랑을 망하게 할 수는 없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아니 엄청나게 많다. 약속은 무슨 약속? 까라면 까고, 까다가 죽으면 땅에 묻어버리면 그만이지.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이제 겨우 50만 관객을 넘었다고 한다. 애초에 예상을 10만명으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많이 본 것 같다. 팟캐스트 이이제이에 나와 홍보한 결과의 예고편 백만뷰는 결국 허수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건 어느정도 예상한 결과다. 상대는 삼성이다. 그리고 여긴 한국이다. 그것만으로도 흥행 부진의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으로 우는 사람들


 사람은 죽으면 슬프지 않다. 주변사람들이 슬플 뿐이다. 그 주변의 슬픔은 김연아의 쇼트프로그램처럼 큰 이슈 한번으로 연기처럼 관심이 사라지기도 하고, 용암 같은 분노가 되어 역사에 남는 혁명으로 투영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죽음은 어떤가? 아직은 그냥 슬픈 단계이다. 라고 자위 (自慰) 하고 싶으나, 이미 많은 이들의 관심에서 벗어났다고 보는게 옳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라고 말하고 싶을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다른 생각이나 계획이 나온다. 현실에 안주하며, 스스로 위로하다 끝나는 촛불의 전례를 또 만들고 싶지 않다. 


 사건이 일어나고 몇년인가? 아직까지 우는 사람들이 있다. 펑펑 눈물을 흘리는 대신 마음으로 우는 그 울음소리는 결국 영화라는 문화 컨텐츠에 그 사건을 담게 만들었다. 그 울음에 우리는 같이 울어줄 수 없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애처로운 불쌍함이다. 그들이 느끼는 슬픔과 분노와 상실감과 무기력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감정일 것이다. 그 들의 눈물을 닦아줄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소비자는 왕이다!' 라며 불매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옳다. 소비자는 왕이며, 불매운동은 생산자나 유통자에게 아주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수단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상대가 삼성이기 때문이다. 삼성을 상대로 불매운동을 해서 옳음을 실천할 수 있을까? 겨우. 대한민국 국민 주제에? 우리는 새로 출시 될 갤럭시 시리즈를 안 살수 있는가? 주변에 그걸 산 사람들을 조롱할 수 있는가? 오히려 조롱하는 사람이 조롱 안 당하면 다행이다. ' 그 제품은 사람을 죽이는 기업이 만든 제품이예요. 그런 제품을 어떻게 쓰실 수 있죠? ' 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삼성이 만드는 메모리를 사용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냉장고 에어컨같은 백색가전은 어떤가? 애초에 그것을 불매한다는 것은 대체자원이 있다는 소리인데 과연 한국에 삼성의 대체 기업이 있을까? LG? SK? 아. 제발 현실을 직시했으면 좋겠다.



삼성반도체 블로그에 글이 올라왔다. 영화로 인한 오해가 안타깝다는 글이었다.( http://www.samsungsemiconstory.com/590 ) 사건에 대한 시점의 차이는 언제나 존재한다. 같은 사건이래도 보는 사람에 따라 흉악 범죄가 되기도 하고, 정당방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글은 애초에 사건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은 현행법 중 명예훼손과 모욕죄에 해당함으로 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글로 말미암아 피해 가족들이 받았을 시선과 대우를 한번에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영화 한편으로 세간에 이목이 집중된 이 상황에서도 저러는데 관심이 현저히 적었던 과거에는 어땟을까?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그때 흘렷을 눈물이 얼마나 처참했을지도 상상가능하다.



또 하나의 부품


 앞에서 언급했듯 우리는 기업에게 있어 부품이다. 그것도 상시 교체가 가능한 일회용 부품이다. 그 부당함 앞에 부품들은 결집하지 않는다. 그저 다른 부품보다 더 돋보이려고 할 뿐이다. 그 부품들은 자신들을 사용해줄 시스템이 만든 제품을 산다. 그것은 마치 노예가 일구어 거둔 곡식을 주인에게 빌려 먹으며 빚을 더 지는 형세와 같다. 그걸 본 기업은 부품들에게 잘 보일 이유도 부품 손상에 대해 책임질 이유도 없어졌다. 막 대하고 착하디 착하고 부지런하고 동료의 죽음에도 회사의 편을 들어주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천박하지만 멀리 놓고 노예로 부리기엔 알맞은 사람들의 존재를 알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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