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60분 - "고객님 만족하셨습니까?", 어느 수리기사의 죽음추적 60분 - "고객님 만족하셨습니까?", 어느 수리기사의 죽음

Posted at 2014. 7. 20. 14:18 | Posted in 리뷰/TV


 사람이 죽었다. 그 죽음의 대가는 '고객 만족' 이다. 고객이 만족하면 재구매로 이어지며, 기업의 이미지도 좋아져서 브랜드 가치가 상승함에 따라 신제품 구입에도 플러스 요인이 있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고객 만족에 항상 신경 쓰며 직원들을 교육한다. 


 궁극적으로는 고객만족을 넘어 고객감동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목표 또한 기업에선 하나의 미션이며 미션에는 돈이 들어간다. 직원의 교육부터 대처시스템의 개발 까지 돈이 든다. 직원의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계산하며 비용 절감에 혈안이 된 곳에서 고객만족 또한 실행함과 동시에 비용절감 종목이 됐다. 그래서 서비스센터는 하청을 줬고, 하청을 받은 수리기사들은 그들의 고객만족을 위해 개처럼 일했다. 고객만족을 위해 혹은 고객만족을 실천하다가 죽은 직원은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와 재구매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 산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업은 그런 직원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은혜 갚은 까치'이야기처럼 상부상조하고 목숨값에 버금가는 예우와 보상을 해야할까? 최종적으로 그들은 기업을 위해 투쟁한 군인보다는 그저 기업의 이익을 위해 쓰다가 버려지는 부품과 같았다. 그 부품은 재활용도 불가능해서 곧 회사와 상관없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故 최종범 씨는 높은 아파트 난관에 설치된 실외기를 수리했다. 어떤 안전 장비도 없었다. 게다가 회사의 이미지를 위해 운동화가 아닌 구두를 신고 작업을 했다. 회사의 이미지는 직원의 안전보다 중요했다. 아니 애초에 직원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어차피 본사 직원이 아닌 하청 업체의 직원이니까 설령 그가 작업 중 사고를 당한다 해도 산재에 대해 본사에 어떤 영향도 없을 것이다. 말쑥한 이미지를 위한 구두 착용은 회사엔 이미지용 전략이겠지만, 직원에겐 죽음의 작업은 아니었을까? 


 일하다가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일을 해야 한다. 일하지 않으면 주인님이 밥을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라는 신파적이고 상투적인 조선 시대 노비들을 일컫는 구절이 생각난다. 저 구절에서 밥을 돈으로 바꾸고 주인님을 기업으로 바꾸면 이 상황과 정말 잘 맞아떨어지지 않을까? 





 대부분 서민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그들이 갑이 되면 자신이 을이었을 때 당했던 서러움과 모멸감을 떠올려 더욱 매몰차게 갑질을 실행한다. 조금만 양보하고 참고 이해하면 모두 더불어 사는 참되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 걸까? 실제로 그럴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이란 나라의 국민은 그런 전제를 부정하고 있다. 당한 만큼 퍼부으며, 그것이 사회생활이라는 것이며, 그런 일들이 겹쳐 설사 한 사람이 죽더라도 그것은 죽은 사람의 의지가 부족한 것으로 치부한다. 그 갑질에 의한 피해에 대해 부당함이나 억울함을 호소하면 사회 선배라는 자들은 으레 너그러운 미소와 이미 산전, 수전, 공중전 다 겪었다는 듯한 포스를 품기며 이런 말을 할 것이다. 


"사회 생활이란게 다 그래.",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다들 힘들어.", "다 그렇게 사는 거야."


 정말 다 그렇게 살지 모른다. 저렇게 말하는 사람의 자식들도. 그 자식의 자식들도.






 故 임현우 씨는 일을 아주 열심히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각종 생활금이 부족했다. 기본적인 도시가스는 물론 끼니까지 걸렀다고 한다. 이쯤 되면 왜 그런 곳에서 일하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그 기업이나 하청업체에서 어떤 식의 착취행위가 있었다는 것은 둘째로 치고 왜 그곳을 달아나 다른 일자리를 찾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일자리 사정이 아무리 안 좋다고 하더라도 실업 때와 같이 생활 여유가 없다면 굳이 그 회사에 다니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심히 궁금해졌다. 




 대기업 메이커의 가전제품을 사용하다가 수리받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수리기사가 작업을 마치고 으레 작업 평가하는 전화 오면 잘 좀 말해달라고 한다. 수리를 마치고 점수 구걸을 하고 나서야 싹싹하게 자리를 뜨는 수리기사들을 보면서 어렸을 때는 그저 인사치레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구걸이었고 구조요청이었다.





 고객 평가가 안 좋은 직원에게 폭언은 기본이었다. 그런데 딱히 한국 사회 어떤 기업이나 조직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조직이 가지는 궁극적인 목표에 의해 인권은 훼손된다. 그래야지만 최대 효율이 발휘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폭언은 양반이지 않을까? 사회적 살인, 경제적 살인, 인격적으로 심한 모멸감 유발, 망신 주기, 없긴여기기가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 팽배하지 않던가? 

 



 센터장이 말한 '실적이 인격이다.'라는 말에 느끼는 감정들은 아마 다채롭지 않을까? 맞는 말이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건 비인권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적이란 단어와 별 상관없이 생활하는 사람에겐 '저건 좀 심하긴 하네'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당연히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에서 월급을 받으려면 실적을 내야한다. 실적을 내지 못하면 밥버러지같은 기생적 벌레이므로 애초에 인권이나 인격은 무시해도 된다고 자본주의는 가르친다. 단언컨대, 이 말에 어떤 거부감도 없으며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많지 않을까? 방송에서는 나름 충격적이라고 생각하고 내보낸거 같다. 그런데 실제로 사회생활이라고 불리는 전쟁을 1년이라도 한 사람이라면 이 말에 별다른 감흥은 없을 것이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이라고 단정 지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저 단어에서 실적을 성적으로 바꾸면 아이들까지 별다른 거부감없이 수긍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고 말할 이상주의자가 아직도 이 시대에 살아있을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학생은 성적이 다이며, 성적이 안 좋으면 인격도 없는 학생이다.

 직원은 실적이 다이며, 실적이 안 좋으면 인격도 없는 직원이다.

 회사는 이익이 다이며, 이익이 안 좋으면 존재 가치가 없는 회사이다.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글로 풀어보면 혐오스러울 때가 가끔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라며 스스로를 속일 수는 있다. 그것이 최소한의 자위라면 자위다. 





 한국의 오랜 병폐 중 하나가 바로 "고객은 왕" 이라는 단어에서 나오는 안하무인의 블랙컨슈머들이다. 


 확실히 말해서 고객은 왕이 아니다. 고객은 고객이다. 고객으로 왕이 된다면 중세시대 돈으로 사람을 사고 팔던 노예제도에서 비롯된 노예들이 자신을 구매해준 주인에게나 할 말이다. 이 말은 제품을 구매해준 손님에게 왕과 같은 대접과 서비스를 해준다는 의미로 이미 많은 매장과 사업체에서 쓰이고 있다. 이런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임으로인해 몇몇 고객들은 자신들을 진짜 왕으로 착각하는 사태까지 일어난다. 멍청한건지 정신병이 있는건지 알 수는 없지만, 실제로 왕처럼 행동하는 그들의 모습은 우리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와중에 피해를 보는 사람은 고객에게 물건을 파는 기업이 아니다. 그 기업에서 일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 기업에서 일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은 그걸로 고통을 받는다.


 사람이 죽었다. 하지만 그 기업의 제품은 여전히 불티난다. 최대의 기업이라며 칭송받는다. 

 사람이 죽었다. 하지만 사상 최대 이익이라며, 역시 구국의 경제 주체라고 칭송받는다.

 사람이 죽었다. 하지만 고객 만족도 1위를 달리며, 최상의 제품을 만들면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는다.

 사람이 죽었고, 또 죽을 것이다. 하지만 신경 쓸 이유는 없고, 앞으로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고객들은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닌 고객으로서. 


故 염호석, 故 임현우, 故 최종범 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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