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60분 - 살아남은 자의 슬픔, 분노추적 60분 - 살아남은 자의 슬픔, 분노

Posted at 2014. 4. 28. 12:49 | Posted in 리뷰/TV

 세월호 사고를 다루는 언론의 꼭지는 크게 2가지이다. 연민과 분노이다.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 학생들이 겪었을 공포와 적막함, 그리고 외로움은 아마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사고 초기 언론에서 떠들었던 에어포켓에 의한 생존이 실제로 있었고, 만약 그 안에 생존자가 있었다면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상황에 비추어봤을 때 생존자는 눈을 감을 때까지 엄청난 고통을 감내하다가 죽었을 것이다. 그 안타까움에 대한 분노는 오롯이 구조 당국 즉, 정부의 몫이다. 이런 분노와는 다른 감정을 토대로 방송을 내보내기도 하는데, 전국민적 트라우마로 승화되고 있는 이 사건을 학생 생전에 추억을 되새기며, 가족들과 친구들의 인터뷰로 감정을 자극하는 연민 위주의 방송이 그것이다. 


 딱히 분노나 연민의 감정을 자극해 방송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밥 먹고 살려다 보면 남의 죽음을 이용하거나 그것을 포장하거나 아니면 은폐하거나 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연민이나 분노 같은 평소엔 쓰레기 같은 감정들도 그것이 하나가 되고 오래가면 어떤 결과를 이루는데 매우 효과적일 수도 있다. 


 이번 추적 60분은 연민의 정점을 찍는 방송을 내보냈다고 생각한다. 


추적 60분 - 살아남은 자의 슬픔 다시보기



 故 정차웅 군은 유달리 정이 많은 학생이었다고 한다. 누가 부탁을 하면 들어주지 않고는 못 견디는 성격, 우리 시대에 거의 멸종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반적으로 정의롭고 더불어 살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추측해본다. 배의 침몰 때도 그랬을 것이다. 이미 언론을 통해 정차웅 군은 몇 번 회자하기도 했었다. 





 故 정차웅 군은 죽어서야 교실로 다시 돌아왔다. '꼭 돌아오기, 죽지 말기'라는 지킬 수 없는 과제가 걸린 교실엔 책상마다 꽃이 놓여 있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는 무덤이 아닌, 자신의 가슴에 자식을 묻는다고 한다. 



 아직 실종 상태인 이준우 군은 수학여행 가기 전날도 새벽까지 공부에 열중했다고 한다. 










 공부 때문에 일생에 한 번뿐일 수학여행을 안 가려고 했던 아들에게 아버지는 추억을 만들라며 등 떠밀다시피 아들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여행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가 갖는 죄책감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어떤 사건에 대한 원인이 여러 가지가 있을 때, 그 중 한 가지 원인이라도 자신에게 해당 하는 것이 있으면 은연중에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진짜 원인은 안전을 소홀히 한 선사나 선장, 선원들임에도 하나의 원인 때문에 죄책감을 평생 지고 가는 아버지에 대한 보상이나 치료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아니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실종자 이준우 군의 아버지 말이 맞다. 현재 상황은 점점 실종자들이 줄어들고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다. 실종자가 10명 단위가 되면 아마 팽목항에는 소수의 가족만이 남을 것이다. 그 전에 있던 다른 희생자 가족에게 같이 자리를 지켜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고 잔인한 대처이다. 이미 시신을 받은 가족은 발인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맞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바로 희생자 가족들, 즉 다수이어서 할 수 있었던 요구들을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바지선의 이용과 오징어 배의 조명 이용 등 피해자 가족들이 낸 의견은 수색에 질을 높이는 의견들이었음에도 해경은 굉장히 느린 속도로 이를 받아들였다. 그것도 아마 피해자 가족들의 항의가 아니었으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해경의 업무프로세스를 정확히 모른다. 아마도 구조 현장에 대한 다른 가능성에 대해 심사숙고를 하다 보니 다른 의견에 대해 그렇게 늦어졌을지도 모른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 


 제일 걱정스러운 것은 10명 이하로 실종자가 남았을 때다. 찾아도 없는 실종자에 대해 가족은 계속 수색을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열댓 명이 소리를 질러봤자. 그런 비효율적인 수색을 정부가 계속 감당할지는 미지수이다. 아마 시신의 유실로 결론이 날 것이고, 여기에 실종자 가족의 어떤 의견도 반영되지 않을 것이다. 의견이 아니라 상태가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 '가족이 사고를 당해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들' 로 인식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들을 대신해 굉장히 이성적인 사람들은 배를 인양할 것이다. 거기 안에 못 찾은 시체가 인양으로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든 말든 그것은 알 바 아닐 것이다. 물론 끝까지 실종자를 수색할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내 말은 소설이다. 




 딸과 아버지는 마치 친한 친구처럼 지냈다고 한다. 아버지 연령대에서는 잘 모를 것 같은 그룹 이름도 딸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줄줄 꿰고 있었다. 친구처럼 장난도 치며, 딸도 아버지에게 스스럼없게 대했다. 이 행복해 보이는 부녀의 미래는 왜 망가져야 했을까?










 사고 초기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한 장의 캡쳐 사진은 아버지에게 말 그대로 희망이었을 것이다. 딸이 쓴 페이스북은 생존의 희망을 상징했다. 딸의 프로필 사진과 페이스북을 작성한 지역에 대한 GPS 정보까지 있는 이 캡쳐는 삽시간에 퍼졌고, 사람들은 기적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었다. 나 역시도 처음 이 캡쳐를 봤을 때, 혹했다. 그런데 혹만 했을 뿐 아마 이것도 가짜일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생각해보자. 상식적으로 바닷속에는 기지국이 없다. 터널에만 들어가도 통화 불능이 된다. 그런데 바닷속 그것도 배의 에어포켓 안에서 저런 통신 기능이 가능할까? 기술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내용의 문제도 있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난다는 말에 내 의심은 더 커졌다. 유리가 깨진다는 것은 공기의 울림으로 인해 소리가 전달 되는 것이다. 즉 공기 중에 있는 유리가 깨진다는 것이고 그것은 에어포켓의 상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폰을 손에 쥐고 내용을 타이핑 할 수 있을까? 물속에 있는 유리가 깨진다고 한들 소리가 날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런 희망고문에 매달렸고, 결국 가족은 더 비참해졌다.


 이런 의심들을 하고 있음에도 그대로 내보이진 않은 것은 이런 알량한 논리보다 정말 기적이란 것을 믿고 싶었던 것 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그 캡쳐에 아직도 미련이 있어 보였다. 딸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흔적에 애착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정부와 구조 당국이 보여준 우유부단하고 확실치 못한 구조 행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건에 대한 경찰의 발표도 쉽게 믿지 못하시는 듯하다.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선장보다 정부를 더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실로 타당한 질문이다. '어젯밤에는 그럼 뭐야. 그 시간 동안 뭐 했어?' 구조 계획을 비밀에 부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피해자 가족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구조 계획 브리핑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사고가 2~3일 지나자 그때부터 체육관에서 브리핑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고가 나서 24시간 동안이 가장 구조에 적기라는 것이다. 그때의 브리핑이 무엇보다 필요했을 것이다. 구조의 구자도 모르는 피해자 가족들에게 브리핑이 필요한 이유는 그 브리핑을 기초로 계획에 대한 공론화를 한다는 것과 계획에서의 낭비와 불합리를 브레인스토밍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해자 가족들은 타인이 아니지 않은가? 절박한 사람들의 뇌 신경이 얼마나 활성화되는지 알고 있다면 그런 좋은 브레인스토밍 기회를 일부러 안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그렇게 아까운 시간은 흘러버렸다.






 아무리 이성을 잃고 감정적인 사람이라지만 기본적으로 저 사람들은 가족이며, 부모이다. 불가피한 계획의 수정이 있더라도 그것을 가족들에게 설명할 의무가 분명히 있다. 그 설명은 없었다는 것은 그저 바쁨의 증명이라기보다는 거짓말로 해석될 여지도 충분히 있음을 인지했다면 좋았을 것으로 보인다.




 해양경찰청 고명석 장비기술국장은 자원봉사자 즉 민간잠수부들의 구조실적이 없다며 불가피하게 참여를 제한한다고 했다. 구조실적이 없어서 참여를 제한해야 한다면, 해경과 해군도 마찬가지 아닐까? 






 바닷속에서 공포와 싸우다 죽어가는 생명에 고위 공무원은 어떠한 해결책도 내놓지 못했다. 수많은 공무원들은 입을 닫았고 부모들의 오열만이 팽목항을 가득 채웠다. 









 구조자 명단에 있던 자식이 없다. 즉 오 입력이 된 것이다. 이를 그저 행정상의 실수로 볼 수 있을까? 이 실수로 부모의 마음은 수천 갈래로 찢어졌을 것이다. 





 승선 인원의 정확한 파악은 사고 10일째인 오늘까지도 안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말이 증명하는 것은 저 배에 기록되지 않은 채 죽어 간 다른 실종자가 있을 것이란 가능성을 의미한다. 


 아무리 IT 정보 선진국이라 해도 결국에 이런 상황이 되어보면 그것이 얼마나 유명무실한지 깨닫게 된다. 










 승선인원의 확실한 정보가 없는 것에 대해 그것은 선사의 명백한 잘못이라고 보고 있단다. 그 잘못이 명백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가 문제이다. 그에 대한 답은 없다.



 승선인원 파악에 대한 업무는 정부도 진척이 없기 마찬가지였다. 



 안산시는 거의 패닉 상태라고 생각된다. 동네에서 눈에 익은 상태로 지나갈 때 인사도 안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패닉 상태를 겪고 있다. 






 갑작스러운 상실은 피해자 가족뿐만이 아닌 안산 시민과 한국의 모든 사람이 느끼는 감정인 것 같다.
















 故 이다운 군의 아버지는 아들을 잊으려고 하는데도 애들만 지나가면 문을 열어보게 된다고 한다. 



 피해자들은 바닷속 차가운 물과 어두움과 배고픔에 고통을 받았을 것이다. 올라오는 물에 숨이 막히는 고통도 느꼈을 것이다. 가족들도 상실의 고통과 후회의 고통으로 멍들어 있다. 이들의 고통을 감싸주고 치유해줄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그들의 고통은 아마 죽는 날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 고통에서 간접적인 패닉을 겪는 타인들은 아마 월드컵이 시작하고 골이 터지면 환호할 수 있겠지만, 가족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 이 영원한 고통에서 그들을 구출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의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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