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60분 - 파업 손배소의 덫, 기업이 만드는 지옥추적60분 - 파업 손배소의 덫, 기업이 만드는 지옥

Posted at 2014. 4. 14. 00:30 | Posted in 리뷰/TV

 노동자라는 단어는 굉장히 부정적이다. 북한에서 노동이라는 말을 많이 써서 일수도 있고, 일명 귀족 노조라는 사람들의 권리 찾기가 횡포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노동자 아닌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신의 몸이 직장에 있어야 하며 그래서 회사의 이익을 위해 몸이나 머리를 써야 한다면 노동자이다. 벤츠를 몰고 멋스러운 넥타이에 정장을 차려입고 출근하여 느긋한 커피로 업무를 시작하는 화이트칼라도 노동자이며, 리어카 끌어서 말도 안 되는 노동 강도를 이겨내야 하는 사람들도 노동자다. 


 많은 사람이 노동자임에도 그 노동자를 부리는 기업의 횡포에 대해서 매우 조용하다. 아니 조용하다 못해 편까지 든다. 자신이 소비하는 물건들의 생산처에서 노동자들을 어떻게 다루든 알 바 아니다. 그저 좋은 물건만 나오면 그만이다. 노조가 반발하여 소비할 물건이 안 나오거나 가격이 비싸지면 되레 파업한 노동자들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어차피 이 세상은 다 남이다. 경상도의 오래된 '우리가 남이가'같은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진짜 부모 형제가 아닌 이상은 그냥 남이다. 노동자가 회사의 사정을 이유로 퇴직을 당해도 남의 이야기이고, 일하다가 유독 물질에 죽어도 남의 일이다. 노동자가 목을 매도 남의 일이고, 그 노동자 가족이 파탄 나도 남의 일이다. 소비자들이 그런 남들인 노동자에게 힘을 보태줄 이유 따윈 애초에 없다. 그래서 항상 대부분 소비자란 이름의 노동자들은 자신에게 그런 불행이 닥쳤을 때 동지를 찾고 동료를 찾지만 결국 그들도 남이 된다. 


 한 달에 백만 원, 혹은 천만 원을 넘지 못하는 돈을 받는 노동자들에게 한 번에 약 10억의 빚이 생긴다 가정해보자. 그것은 지옥이며, 다른 형태의 살인이다. 그 살인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까지 철저하게 도륙하는 비정하고 참혹한 살인이다. 법치주의 국가 한국은 그런 살인을 허용한다. 한국의 노동 시장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지옥인 셈이다. 







 파업은 노동자들이 기업을 상대로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 협상의 안건이 임금이든, 해고든, 복리후생이든, 회사 측에서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파업으로 의견을 피력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헌법 33조에서 노동자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하여 단결권(노조를 결성할 권리), 단체교섭권과 더불어 단체행동권(파업)을 노동자의 권리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애초에 노동자가 하는 파업에 불법이란 없는 게 맞다. 헌법에서 인정하고 있는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자가 있다면, 한국의 헌법을 부정하는 사람으로 요즘 흔히 말하는 종북이나 빨갱이로 분류하여도 어감이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받으려는 기업과 그 피해 보상을 인정한 법원은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해고를 당하고 거액의 손배소를 짊어진 노동자들이 찾는 곳은 대부분 일용직이라고 한다. 딱히 거액의 청구 금액이 없더라도 일용직으로 가장 노릇을 하기에는 매우 벅차다. 생활도 어려운 박봉으로 손배소까지 생각해야 되는 사람들의 기분은 아마 절벽 위에 선 기분, 그 이상일 것이다. 


 기업은 노동자에게 경제적 살인을 감행하고, 법원은 이를 허용한다. 노동자는 살인을 당하고, 가족들도 살인을 당한다. 그리고 그 살인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안타깝거나 신경 안 쓰거나 두렵지만, 결코 그 일에 대해 해결하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똑같은 살인을 당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거대한 불한당 한 명이 백 명의 주민 중 그들에게 덤비는 주민을 살해하는 장면이 있음에도 대부분 주민은 조용한 그런 분위기이다. 다음 차례로 누군가 살해될 거란 뻔한 예견이 가능함에도 그렇다.






 젊은 나이도 아니고, 딱히 기술도 없이 회사에 다니던 사람이 해고를 당한 상태에서 어떻게 자신이 그동안 번 돈보다 많은 돈을 배상할 수 있을까? 그건 그냥 죽으라는 이야기이다. 해고 노동자의 아내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목숨값이 그 정도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업이 살인을 결정하고, 법원이 살인을 허락했다. 그것은 경제 논리와 법치주의라는 이름으로 대부분 국민들에게 억울하지만 지켜야 할 거리가 된다. 마치 원시 시대 족장이 누군가의 사형을 결정하며, 부족 원들은 그것이 합당하지는 않으나, 지금껏 그랬듯 그들의 사형에 토를 달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한국은 지금 원시시대와 같은 수준이라고 볼 수도 있다. 







 노동자의 눈물이 서럽다. 평생 만져보지도 못한 억 소리 나는 돈을 파업했다는 이유로 손배소 당했다. 직감적으로 그녀가 어떻게 저 상황을 극복할지 감이 왔다. 150여억 원의 빚을 한번에 신경 안 써도 되는 그런 방법, 주위 슈퍼에 가면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것으로 그녀는 언제든지 큰 빚에 자유로워질 수 있다. 


 현실적 감각마저 떨어지는 큰 금액의 빚은 경제적 살인을 뜻한다. 현대의 사람은 굳이 칼로 치명상을 입히지 않더라도 밥줄을 잘라 버리면 죽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게 더 효율적이다. 사람들은 목을 비틀고 온몸을 분쇄하는 토막살인에는 분노하며, 공분한다. 하지만 고매하신 기업이 하는 경제적 살인에 대해선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할 뿐 결코, 분노하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뿐만인가? 그 살인을 당하는 노동자들마저도 웬일인지 평소 느낄 수 없었던 법이라는 무기 앞에 도살장에서 온순하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가축이 돼버린다. 


 화를 냈으면 좋겠다. 몇백억이 넘는 돈, 어차피 갚을 수 없다고 치고, 그걸로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잃을 것 없는 사람이 된 이상, 그런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 똑바로 알려주는 것이 맞지 않을까? 라며 혼자 되뇌어 본다. 그들에게 아무 조언도 할 수 없다. 난 그들의 일이 픽션처럼 느껴지고, 그들은 그 일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A 기업의 손해배상 내역은 제품과 자재가 파손된 비용, 설비파손 복구비용, 공장점거 기간 내 고정비용으로 총 156억을 청구했다. 파업 시에 공장을 점거하면서 파업을 했고, 설비와 제품의 파손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A 기업의 경우 거액의 손배소를 취하하는 대신 희망퇴직, 즉 알아서 나가주면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기업과 협상하기 위해 어떤 파업을 하면, 경제적 살인으로 협박한 후에 내쫓는다. 결국, 협상을 시도했던 노동자들의 집합인 노조가 무너지게 되고 그 후 회사는 무소불위의 노예상이 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A 기업의 노조 측에 나온 문건은 노조가 파업하기 전에 회사에서 작성되었던 것이라고 했다. 즉 노조의 파업에 대한 상황 대처 매트릭스와 같은 것인데, 이에 대해 정말 회사의 것인지, 아니면 노조가 편집했는지 알 수가 없다. 해당 문건의 양식은 회사의 것이 맞으나 출처 불명이다. 하지만 이 매트릭스대로 현실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기에 이 매트릭스가 정말로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기업은 노조에게 사과를 받고 싶다고 했다. 물론 파업으로 노조가 기물을 파손하며, 회사에 피해를 준 부분은 사과를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회사도 노동자에게 경제적 살인으로 협박한 것을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 내 상식으로는 기물 파손과 살인 중에 살인이 더 중하다고 알고 있다.








 B 기업의 노조도 나왔다. 이들은 손배소 노조가 완전히 와해한 사례이다. 즉 협박에 못 이긴 사람들이 노조를 다 나가버린 것이다. 현재는 2명이 남아있는데, 그건 절대로 노조라는 이름으로 힘을 쓸 수 없는 형태이다. 노동자의 권익과 보호를 위한 노조가 없어지면 기업이 할 것은 딱 한가지다. 기업 이익에 맞춰 노동자를 굴리고 분쇄하는 일이다. 







 민주노총 자료로는 파업 손배소 이후 노조원은 급격히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파업 손배소로 노조원에게 노조를 탈퇴하라든가, 희망퇴직을 하라고 하는 것은 불법이 아닌 모양이다. 어쨌든 이로써 증명된 사실은 결국, 노동자란 기업에 함부로 덤비면 패가망신하는 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현재 박근혜 정부의 노동 정책 주요 모토는 높은 고용률이다. 시간을 쪼개서 전 국민을 비정규직화시키더라도 많은 사람에게 일단 일자리를 주자는 발상이다. 그러니까 일자리의 개수가 중요할 뿐 그 일자리의 안정성은 둘째로 미룬 정부이다. 그런 정부 밑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은수미 의원의 말을 들어보면 법원도 그리 노동자 계층에 호의적인 기관은 아닌 것 같다. 원래 법이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법원의 허락으로 노동자들의 경제적 살인은 허가받는 것이다. 


 법원에서 쓰는 법은 누가 만드는가? 바로 국회의원들이다. 국회의원들이 이런 노동 시장에서 기업 횡포에 관한 규제 법안을 마련하면 문제의 많은 부분이 일단락될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부터 규제를 싫어하고, 국회의원 중에도 노동자보다는 엘리트 계층이나 기업과 친하거나 기업의 총수 계층의 사람들이 많은데 과연 그들이 그런 법을 발의할까? 발의해서 통과할까? 그들에겐 노동자들의 삶보다 이미 죽은 대통령의 NLL 포기나 무인항공기가 더 관심거리 같다. 그런 국회의원들이 있는 것은 노동자임에도 아직 저런 추한 꼴을 안 본 사람들의 많은 지지가 있기 때문이다. 소수의 노동자에 대한 경제적 살인은 결국 원천적으로 민심일까? 






 이런 국가적인 문제의 경우 방송들은 시청자의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일종의 자위를 시켜준다.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의 사례를 드는 것인데, 아주 단골인 외국은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미국, 영국, 프랑스이다. 즉 어느 정도 복지가 잘 되어있거나 부자거나 민주주의가 잘 된 나라들이다. 한국의 시궁창을 계속 보여주면 사람들은 싫어한다. 그것이 현실이고, 극복해야 함에도 싫어한다. 그래서 방송은 시청률을 방어하며, 재시청을 위하여 외국의 잘된 사례를 보여준다. 이때 중요한 것은 배경음이 굉장히 활기차고 희망적이며, 신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에서의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그걸 보는 사람들은 마치 곧 저 외국의 사례가 한국에 도입될 것처럼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영국에서는 이미 19세기에 노동 쟁의에 관해 불법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영국의 19세기에도 못 미치는 나라라는 것이다. 물론 영국 또한 마가렛 대처라는 위대한 수상 시절 노동 쟁의에 관해 매우 타이트 하게 관리한 역사가 있다. 하지만 그때에도 노동자에 관한 소송은 우리나라만큼 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노조원의 숫자에 따라 손배소 액수가 결정되는데 5천 명 미만은 한화로 1,800만 원이다. 영국의 법대로 하면 현재 손배소 걸려있는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의 약 90%는 1800만 원의 액수를 못 넘는 것이다. 하지만 저긴 영국이고, 여긴 한국이다. 절대로 영국처럼 될 일 없는 것을 방송에선 알려주지 않았다.






잃을 것 없는 사람은 무섭다. 잃을 것 없는 사람들의 조직은 굉장히 무섭다.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것에 일말의 두려움도 없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은 노동자들을 점점 잃을 것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쥐도 고양이를 문다. 하지만 한국 노동자들이 과연 기업에게 경종을 울릴 만한 투쟁을 할까? 진심으로 말하는데, 촛불 들고 같이 노래 부르고 공연하고 '투쟁!' 한번 외치고 끝날 것이다. 그들은 아직 잃을 게 많다. 


뒤비종 - 노르망디 판례

 출퇴근 체크기 도입에 반대하여 일어난 파업에 관해 파업 중 생긴 파손을 회사 측이 노조에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이다. 판결은 노조원에게 연대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했다. 물론 외국의 판례이다. 




 노동자에 대한 거액의 손배소는 비단 노동자만의 것이 아니다. 노동자 가족이 모두 짊어져야 하는 짐이 된다. 즉 가정파탄과 연결된다. 많은 노동자의 아내들이 파업 손배나 가압류로 인해 남편과 이혼 위기를 겪었다고 답했다. 


 가정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 안 그래도 낮은 출산율은 내수 시장의 불황을 더욱 고착화 한다. 물론 우리나라는 수출로 먹고 살며, 노동 시장도 외국인 노동자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이런 가정 파탄이 기업과 상관없을 수도 있다. 



 손배를 당한 가정은 극도로 우울해진다. 자연스레 대화가 없어지고 교감도 없어지며, 삶은 고통으로 점철된다. 그 고통이 기업의 철문에 와 닿을지는 모르겠다. 



 요즘 세상 사람이 죽는 게 아무것도 아니다. 조금 충격적이거나 이색적인 죽음은 언론이나 방송에서 상품으로 포장되어 일반 사람들에게 판매된다. 어쩌면 기업이 방송을 위해 이런 서비스를 하는 것일까? 


 손배소 피해 가정의 아내는 절반이 넘는 63%가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고 답했다. 이것은 그냥 자살이 아니다.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는 하나의 살인 형태이다. 법원은 이들을 궁지로 몰아넣을 때는 기업의 손을 들겠지만, 이들이 죽음에 이르면 거기에는 기업의 책임이 없다고 할 것이다. 법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기업이 만들어내는 지옥에 살고 있다.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빚내서 간다. 기업에 취직해 노동자가 되면 노예가 된다. 그들의 의견을 말하면 묵살당한다. 그런 과정에서 발끈하여 파업하면 위와 같은 손배소를 당해 경제적으로 불구를 만들어 버린다. 그 불구들은 일용직을 전전한다. 거액의 빚은 고사하고 생활이 막막해질 때쯤 가정은 파탄 나고 삶은 위협받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한국의 노동 인식이 바뀌고 노동법이 개정되며 보완되어도 이런 일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왜냐면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를 이해하지 않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버스 운전 노동자가 처우에 불만을 들어 파업한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버스를 이용하여 일터에 가는 다른 노동자는 버스 운전 노동자를 비난할 것이다. 버스 운전 노동자가 상식 이하의 급여를 받으며, 노동 강도가 너무 높든 말든 상관없다. '파업하는 것들은 아직 배가 고파본 적이 없는 것들.' 이라며 유순하고 잘 적응해가는 노예가 된 자신을 보며 자랑스러워 할 수도 있다. 


 지난 MBC 파업을 기억한다. 초반에는 언론 자유를 외치며 많은 시민도 그에 동조했다. 하지만 장기화 돼가는 파업에 시민들은 굉장히 인상적인 반응을 보였다. "파업하는 건 좋은데 무한도전은 언제 다시 시작하죠?" 난 이 말을 듣고 멘붕에 빠졌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남이라는 것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남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이기심의 끝판왕들이 한국에는 널려있다고. 괜히 파업해서 패가망신하지 말고 유순한 노예가 되는 것이 최선 아닐까? 적어도 이민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답은 2가지이다. 번개탄에 콩 볶아 먹다가 사고를 당하거나, 아주 유순하게 꼬리를 말고 자신의 뺨을 대주며 웃는 노동자가 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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