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본 리어카와 도로 한 가운데 고양이 사체새벽에 본 리어카와 도로 한 가운데 고양이 사체

Posted at 2014. 4. 11. 20:36 | Posted in BLOG/끄적끄적

 곧 여름이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다며 그것을 자랑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별로 뚜렷하지도 않을뿐더러 사계절 중 사람이 살기 편한 계절은 가을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덥고 재수 없는 여름이 오기 전에 늦봄의 시원한 새벽 바람을 느끼러 산책을 나섰다. 산책의 친구인 핸드폰을 가장한 mp3는 배터리가 없어서 서운했다.


 가로등이 듬성듬성 켜져 있고, 어느 것은 깜박인다. 기침 한 번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요한 거리를 거닐며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은 꽤 운치가 있다. 늦은 시간까지 장사한 듯한 고깃집을 지나니 탄 고기냄새가 났고, 가게들은 셔터가 닫혀있었다. 고요하고 운치 있었다. 하지만 곧 그 운치를 즐길만한 여유는 사라져버렸다.


 가는 길의 교통량이 많은 편인 사거리 도로에서 고양이 사체를 봤기 때문이다. 고양이 사체는 신기할 정도로 납작하게 아스팔트에 붙어있었다. 새벽에 혼자 그 광경을 목격한 것은 생각보다 기괴하고 으스스한 느낌이 들게 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저 시체를 어떻게 치우려나? 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도둑고양이가 많은 우리 동네는 한밤중에도 언뜻 들으면 아기 울음소리 같은 고양이 소리가 여기저기 들린다. 가까운 이웃이면 숙면을 방해하는 그들을 향해 욕이라도 할 텐데, 동물한테 그렇게 한다고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 결국 빠른 포기를 선택한다. 갈색 줄무늬가 있는 고양이나 검은 고양이가 태반인 그 녀석들은 언제나 소외당하는 존재이다. 한밤중의 소음과 잘 정리된 쓰레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고양이로써 몇 번째 고통 일까? 소나타 한 대가 그 고양이 사체를 더욱 납작하게 했다. 그 광경을 계속 보지 못하고 다시 길을 걸었다. 그 녀석들은 죽음도 서운함의 극치를 달린다고 생각하고 길을 나설 때쯤 저 멀리 파지를 줍는 노인이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있었다. 도로 갓길을 따라 리어카를 끌던 노인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어떤 농약의 이름일 것 같은 상표가 붙은 모자를 쓰고 회색 점퍼에 누리끼기에 가까운 아이보리색 바지를 입었다. 여기저기 땟자국이 스민 옷은 입은 사람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리어카의 오른쪽 바퀴가 덜컹거리는 게 문제가 있어 보였지만 그것을 굳이 지적하고 싶진 않았다. 덜컹덜컹 거리며 아슬아슬한 파지 더미를 끌던 노인도 고양이 사체를 발견했다. 


 노인은 잠시 그곳에 서서 처리 불가능해 보이는 그 시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리어카 몰이가 힘들어 잠시 쉬는 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노인 특유의 혀 차는 소리 "쯧쯧"을 하고 "불쌍허이"라며 가던 길을 갔다. 인적이 드물고 자동차도 별로 없어서 그의 말은 가깝게 들렸다. 굉장히 허스키한 가래를 연상시키는 목소리에는 슬픔의 감정보다는 그저 하나의 순리에 대한 평의 느낌이 강했다. 그러니까 비가 오면 "비가 오네" 눈이 오면 "눈이 오네" 라는 식의 말투였다. 


 우리 사회에 소외 계층인 빈곤노인이 우리 동네의 소회 계층인 도둑고양이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무서워하거나 더러워 하는 것을 제외하고 과연 몇 사람이나 그 미물에 입장에서 감정을 느꼈을까? 몇몇 사람보다 동물이 더 좋은 애호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신경을 쓰지 않거나 휙 지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범죄라거나 잘못된 행동도 분명 아니다.


 피부로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보다 노인이 고양이를 바라보던 그 눈빛이 산책 내내 잔상으로 남았다. 


세상의 무관심과 무시를 한꺼번에 받으며 사는 사람은 세상의 무관심으로 한없이 압사당하고 있는 고양이를 봤다. 그저 처리 불가능해 보이는 오염물로 생각했던 나와는 다르다. 노인이 불쌍하다고 하며 머릿속으로 덧붙이기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것은 미물에 대한 최소한의 낭비 없는 예의였다. 그런 예의는 비슷한 처지여서 더 잘 느낄 수 있는 감정일까? 가벼운 산책이 아닌, 그 생각으로 가득 찬 복잡미묘한 도보가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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