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게 만들고, 부럽게 만든 현성 삼부자 - 슈퍼맨이 돌아왔다부끄럽게 만들고, 부럽게 만든 현성 삼부자 - 슈퍼맨이 돌아왔다

Posted at 2014. 3. 24. 08:45 | Posted in 리뷰/TV

 요즘 예능은 삐뚤게 볼 수밖에 없다. 오랜 학습효과 때문일까? 웃음은 가짜이고, 스토리도 만들어진 것이며, 이 모두가 그 예능을 행하는 사람이 아닌 지켜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그 프로그램에 잡아두려는 속셈이 있기 때문이다. 때마침 진짜사나이의 헨리 조작설도 나돈다.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그런 것이 이슈가 된다는 자체가 이해가 안 간다. 그래서일까? 예능 프로 속에 진짜 감정의 흐름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감동을 하여버린다. 물론 그런 일은 거의 없긴 하다.



 슈퍼맨이 돌아왔다. 라는 프로그램은 킬링타임용이었다. 재미도 그저 그랬고, 이렇다 할 흥미 유발요소도 없었다. 아이를 팔아서 시청률 올리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단연 '아빠 어디가'가 최고 아니던가? 하지만 저번 주 편의 딱 한 가족의 모습을 보고 약간 생각이 달라졌다. 


 추블리라는 스타가 눈에 안 들어왔다. 물론 귀엽고 깜찍하다. 그런데 애들은 다 그렇지 않나? 굳이 TV에서 안 봐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흔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그 아이에게 열광하는 게 언뜻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초반에는 그 흔함이, 나오는 모든 출연 가정에서 보였다. 하나같이 좋은 아빠들, 천방지축에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맑은 아이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인기몰이를 할 수 있는 시대임에 불현듯 서글퍼지기도 했다.


 딱 한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배우 현성 씨 삼부자이다. 삼부자는 한 번씩 나름의 술자리를 마련한다. 그걸 주기적으로 하는 걸 보고 "왜 저런 걸 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 씬이 엄청나게 큰 것을 느끼게 해줬다. 그건 바로 '행복한 가정'이다. 


 6~70년대 아빠들은 하나같이 독불장군에 마초 기질이 다분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그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지나고 저출산 시대가 도래했다. 부모들도 좀 더 따뜻하고 다정해졌으며 숫자가 줄은 만큼 교육열과 애정을 쏟는 빈도도 달라진 것은 이제는 상식이다. 배우 현성 씨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대가 말하는 아버지상이다. 하지만 내가 행복한 가정이라고 느낀 데에는 그런 부성애 가득하고 다정다감한 아빠를 봐서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예능을 보는 것은 불편하다. 하나하나 작가의 지시이며, 포장된 상황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저렇게 삼부자가 옹기종기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하는 어색한 장면도 '무언가 노림수가 있겠지.' 하고 색안경을 끼었다. 현성 씨가 말을 하고 아이들이 리액션을 하거나 엉뚱한 짓을 하는 것도 작가가 지시한 것일 수도 있다. 그 와중에 재미도 없고, 어색함 마저 느꼈었다. 그런데 왜 저번 주 부자간 단합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누구나 행복한 가정을 꿈꾼다. 돈이 다인 이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이 말하는 목표는 "행복"임에 나 또한 동조한다. 하지만 진짜 행복이 무엇일까? 한 꺼풀 벗기면 결국 돈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진실 아니던가? 하지만 현성 씨 삼부자는 진짜로 진실로 그것도 아주 신명 나게 행복을 보여줬다. 아버지가 다정다감해서가 아니다. 아이들이 아이들답게 많이 웃고 엉뚱해서가 아니다. 아버지의 연애를 말하고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피로 얽힌 이 시대에는 결국 그저 짐일 뿐인 공동체 속에서 '공감'을 하고 있었다. 


 풍차돌리기 잘하고 힘센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는 준서는 작가가 그렇게 말하게 시킬 수 있다. 그걸 듣고 '현성 씨는 크게 웃는다.' 라는 대본을 받았을 수도 있다. 자신은 육아를 하고 싶어 돈을 잘 버는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준우도 대본을 달달 외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성 씨가 푸는 연애스토리는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 정도 디테일과 논픽션에서만 나오는 극적임은 작가가 쓴다고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는 현성 씨도 준우도 준서도 모두 진짜로 행복해하는 것이라 생각됐다. 추억을 나누고 웃으며 또 추억을 쌓는 그 공감대가 아마 '행복'의 한 종류가 아닐까? 내가 보기엔 너무나 부러운 순간이며, 그것이 행복처럼 느껴졌다. 마음 한가득 충만한 삼부자간의 스토리를 보고 있노라니 예능은 불편하고 거짓말투성이 라는 생각이 눈녹듯 사라져버렸다. 정말로 너무나 부러웠다. 


 결과적으로 현성 씨의 연애이야기가 아닌 한 대를 거슬러 올라가며 완벽한 화음을 이룬 스토리까지 나를 감동케했다. "현성아 현성이가 자기 일을 열심히 해주고 있어서 참 고맙고 믿음직해서 아빠가 참 좋다." 라고 말한 아버지가 좋다던 현성 씨는 아버지를 기리며, "지금 이 순간은 늘 마지막이다. 다시..다시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이다." 라는 말을 했다. 그 감정이 너무도 훅 들어와서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던 삼부자의 단합이 아닌, 그 순간을 마지막으로 생각하며 아들들과 최선을 다해 추억을 만들려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다정다감하기만 한 아버지였다. 라고 생각했으면 결코 난 감동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순간을 영원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절절한 마음을 가진 아버지였기에 그렇게 느꼈으며, 그래서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행복은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동의는 하나, 어떤 사례가 있는지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난 전혀 몰랐다. 그런데 티비에서 그것도 예능에서 게다가 어린이들의 감정을 제작진의 자막 한 두 줄로 임의 해석해서 불편하다고 평했던 프로그램에서 느낀 것이다. 


 아버지에게 한 번이라도 연애 시절을 물은 적이 없고, 아버지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빛바랜 사진첩 젊은 시절 아버지의 신혼여행 사진들과 나팔바지에 마이를 입고 한껏 멋을 낸 사진들이 생각났다. 이 세상 모든 아버지는 그런 시절이 있는 것이다. 난 그런 중요한 사실을 아예 인식조차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란 사람과 난 삼부자보다 더 어색한 사이는 아닐까? 공감이란 것이 존재할까? 의무적인 가족애 말고 인간 대 인간으로 그와 나는 지금 순간순간을 너무 낭비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 부끄러웠다. 티비에 나온 현성 씨네 삼부자에게 부끄러운 게 아니다. 아버지에게 부끄러운 게 아니다. 미래의 나에게 너무 부끄러웠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라는 절대 명제 아래 나도 언젠가는 나이 먹은 고아가 될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 고아가 된 나에게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왜 진작 공감하지 않았냐고 나이 먹은 고아가 나에게 소리칠 것 같았다. 


 방송을 본 사람들이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한발만 물러서 생각해보면 결국 모두가 생각해야 할 문제임은 분명한데도 말이다. 


 남는 건 사진이 아니라, 추억이다. 순간을 낭비하면 결국 그 순간들이 모여 나에게 언젠가는 비수로 돌아와 마음을 후벼 팔 것이다. 진심으로 부럽고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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