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투유마 - 신선한 서부 영화 (3:10 to Yuma, 2007)3:10 투유마 - 신선한 서부 영화 (3:10 to Yuma, 2007)

Posted at 2014. 2. 9. 12:58 | Posted in 리뷰/영화

 무언가 총잡이 스러운 영화라는 건 알고 봤다. 그리고 전체적인 영화의 느낌은 확실한 서부 영화였다. 미국의 서부개척시대 혹은 바로 그 후 시대,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의 시대, 어쨋거나 폭력적이고 잔인한 그런시대를 그린 영화였다. 영화에 버무려진 시대상과 그 속의 서민들의 삶 그리고 법 위에 군림하는 무법자들의 이야기는 너무나 케케묵은 소재이다. 하지만 '3:10 투유마' 라는 영화는 그런 틀 속에서 너무나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상황들을 집어넣었다. 애초에 SF가 아니고서야 모든 미디어는 논픽션이 더 강세를 보인다. 



 픽션중에서 논픽션을 이기는 스토리는 나오지 않는다. 논픽션의 매력은 바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감을 끌어내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어떤 전쟁을 보더라도 논픽션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도망간다. 시체 썩는 냄새와 화약냄새, 그리고 죽음의 공포와 허락된 살인의 광기속에 나약한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쟁 영화들은 어떤가? 영웅적인 인물들과 이유가 없는 애국심, 떨어지지 않는 총알,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나에게 신선했다. 물론 전투씬에서는 그런 상투적인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스토리라인에서 한번씩 비치는 인물들의 과거와 관계를 나타내는 자체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아메리칸 싸이코>, <배트맨 비긴즈> 란 영화로 내 기억속에 강하게 인식되어 있는 크리스챤베일이 나왔다. 팬이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좋아하는 배우이다. 아메리칸 싸이코에서 그의 신들린듯한 연기와 마지막 반전은 나의 뇌를 크게 한번때렸고, 그 타격에 의한 진동은 근 한달간을 계속되었다. 이 영화에서 크리스챤베일은 무엇에 중점을 두고 연기에 임했을까? 아니 애초에 그것이 중요할까? 퇴역군인이며, 아버지이며, 남편인 그에게 한 쪽 다리의 장애와 녹록치 않은 형편은 어쩌면 극의 주인공이 되는데 꼭 필요한 설정이었다. 그런 형편에서 아버지로써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행동들이 마지막 반전으로 다가오는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내가 동양인이어서 가부장적 인식이 너무 강한 탓도 있을 것이다. '가장은 가족들을 먹여살려야 된다.' 라는 어이없고 출처 불명의 명제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보면 당연히 가장이니까 목숨걸고 돈을 벌기위해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나오는 반전 장면을 보고 그런 이유도 있겠거니 하고 AND 의 의미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아주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가장으로써의 책임감이 아닌 남자로써의 명예랄까.. 마지막 자존심이랄까.. 그런것이 느껴졌다. 


 이 영화 표면에는 감동적인 코드가 없다. 하지만 그 속에 고의적으로 숨겼는지, 만들다보니 어쩌다 그렇게 된건지 모를 감동 코드가 있다. 바로 부성애이다. 아들 앞에서는 언제나 강한 사람이고 싶은 사람 그대의 이름은 아버지. 라는 느낌의 장면들이 있다. 꽤나 비중있고 기억속에 남을만한 장면들이다. 세상은 어딜가나 부모와 자식이란 관계가 있고 그 관계들을 통들어 우린 가족이라 부른다. 아버지는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는 나를 기르신다는 명제에 맞게 아버지와 자식간에는 무언가 끈을래야 끈을 수 없는 질기고 긴 끈이 있다는 것을 영화를 보며 느꼈다. 부성애라서 아버지가 자식에게 무언가 사랑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아버지가 아버지로써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장면을 보이는 것이다. 황금만능주의에 찌든 나로써는 크리스챤 베일이 돈과 책임감을 선택하는 기로에서 아주 큰 실망을 했다. 하지만 결국에 그는 돈과 돈보다 중요한 아버지로써의 체면을 모두 가졌다. 다만. 제일 중요한 것을 놓쳤을뿐..



 시대를 막론하고 무법자들은 언제나 존재했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서양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다. 영화 속 무법자들의 두목인 러셀 크로우는 무법자라는 이름에 알맞는 전투 능력을 보유한 것 같다. 하지만 무법자로써 가장 중요한 상상을 뛰어 넘는 냉혹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켰다는 느낌이다. 끝 없이 냉혹하고 잔인하며 이기적인 사람이 무법자이어야한다. 하나의 아픈 추억이나 과거가 있고 인간적이며 이타적인 악당은 있을 수 없다. 세상이 이리 험악하여 흘러흘러오다보니 이렇게 무법자가 되었다. 라는 소린가? 그렇지 않다. 애초에 그런 사람들은 서민이라는 타이틀로 우리와 아주 가깝게 지낼 타입의 인간들이다. 무법자들은 그런 우리와는 태생적으로 다른 사람들이다. 인간은 모두 같게 태어나며 성선설과 성악설 성무성악설 같은 여러 이론이 존재하지만 결국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의 기준은 모호함에서 일어나는 착각이다. 확실히 영화에서 러셀 크로우는 악당일지도 모른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빼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그 시대의 특성일수도 있다. 그는 그저 살기위해 그러는 것이며, 범법자이지만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법을 어기면 나쁜 것일까? 남에게 피해를 주면 나쁜 것일까? 나쁘다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되도않는 의문들이 머리 속에 난립하게 만들었다. 이 어이 없는 현상은 영화에서 러셀 크로우의 인물 설정이 아주 애매했었기 때문이다. 감독이 어리버리하니까 관객이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저 총 쏘고 정의를 지키는 서부영화가 아닌 시대 상황에 맞물리는 서민의 삶을 보여준 것이 이 영화의 장점이라고 생각 한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서민들은 힘들다. 그 힘듬은 언제나 서민보다 힘쌘 사람들 때문이다. 착취하고 억압하고 약탈하고 죽인다. 


 허나 지금의 시대보다 영화 속 시대가 더 낭만적으로 보이는 것은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적어도 정부라는 것의 힘이 거의 없는 서부개척시대의 상황에서 스스로의 삶을 돌보는 사람들의 행동이 아닐까? 난 아나키스트 같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하지만 국가라는 큰 조직의 개입이 없는 인간 하나하나는 위대하고 영리한 삶을 영위한다. 



 한국식으로 생각해보자. 돈없는 농장주인이며 다리까지하나 없는 사람이 결혼이 가능할까? 내 생각이지만 가능하다. 전제조건은 크리스챤 베일같은 외모의 소유자여야한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부부사이에는 위화감이 넘쳐흐른다. 이것도 나름의 복선일까? 둘 사이가 삐걱거리는게 풍족하지 못한 경제력이라고 생각하라고 떡밥을 던지는 감독이 연상된다.



 게임 중에 ' 콜 오브 후아레즈 ' 라는 시리즈가 있다. 콜 오브 듀티 시리즈를 만든 회사의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FPS 장르로 총싸움이며, 시대는 서부시대이다. 꽤나 재밌게한 게임이다. 황야의 무법자 라던가 OK목장의 결투 같은 옛날 노란색으로 기억되는 서부영화를 기억에 남게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 게임으로 인해 서부 영화도 어느 정도 거리감 없이 보게된 계기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장점은 바로 색채라고 생각한다. 일단 서부 영화라고 하면 황토색 흙먼지가 날린다. 허허벌판에 마을들이 있고 그 마을에는 보안관이 있다. 총잡이가 있고 인디언이 있고 매춘부가 있다. 그 정도 설정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언제나 총잡이나 보안관이 악의 무리와 1:1 대결을 하며 신속 정확하게 악의 심장에 구멍을 내며 영화가 끝난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색채가 현대스럽다. 흙먼지도 별로 안날린다. 보안관이 나오지만 겁쟁이였다. 매춘부라기 보다 여자가 등장한다. 그래서 좋았다.



 잔혹한 시대의 잔혹한 말로를 맞이하는 사람들을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리들에게는 그 시대의 낭만이나 풍류 혹은 희망을 느낄 재간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지금보다 자유로웠고, 언제나 힘들었지만 자신이 선택한 힘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야될것이있다. 이 모든것은 "백인" 한테만 적용된다. 엄연히 그때 당시에도 유색인종의 차별과 노예제도는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중반에서도 나오듯이 중국인들이 터널을 공사하는데 있어 미적대자 "검둥이들 일하는 것처럼.. " 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문득 중학교 시절 선생님이 해줬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인 안창호 선생 이야기이다. 그 선생이 미국에 유학을 가서 알바를 하는데 어느 집의 청소를 하는 일이었단다. 그 집 주인이 외출을 하고 안창호 선생은 그 집의 바닥부터 벽면 창문까지 빠르고 아주 완벽하게 청소를 했다고 한다. 집주인은 돌아와서 '원더풀 원더풀' 하며 안창호를 극찬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며 우리도 청소를 잘하며 비록 내 것은 아닐지라도 주인의식을 가져야한다는 개소리를 했다. 이 생각이 난 이유가 있다. 영화와 현실의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찢어지게 가난하고 언제나 약자인 서민이라는 점에서 우리와 크리스챤 베일은 다름이 없다. 다름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노예적인 삶을 살고 노예 교육을 받으며 노예적인 선택을 한다는 것이고 영화 속 크리스챤 베일은 적어도 마지막 순간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자신의 명예를 지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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