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머리 앤을 보다가 살아난 기억, 오타쿠는 범죄나 혐오의 대상이 아니다.빨강 머리 앤을 보다가 살아난 기억, 오타쿠는 범죄나 혐오의 대상이 아니다.

Posted at 2014. 5. 18. 12:55 | Posted in BLOG/끄적끄적

 빨강 머리 앤 DVD가 생겨서 다시 보고 있다. 어렸을 적 더빙된 목소리와 한 편씩 보여주어 감질나서 잠 못 들게 한 그 애니를 한꺼번에 보려니 감회가 새로웠다. 배경음도 좋고 작화는 옛날 풍이지만 거부감은 없었다. 무엇보다 스토리와 대사들이 주옥같다. 문학적이며, 때로는 시적으로 까지 생각되는 대사들을 듣고 있노라면, 이미 앤의 빨강머리에 타임 리프를 경험하기도 한다. 빨강머리 앤의 진짜 재미는 소설책이며, 소녀가 입양돼서 성장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의 성장기까지 표현했다고 하는데 그 정도 강성 오타쿠의 영역까진 생각도 못 해봤다. 애니메이션만으로도 충분히 재밌다. 


  

중학교 때 담임은 국어 선생이었다. 처녀 선생이었는데, 약간 대차고 거리낌 없는 그런 선생이었다. 싫다, 좋다의 생각도 나지 않는 옛날 일이 앤을 보면서 갑자기 생각났다. 


 그때는 오타쿠라는 말은 아예 없었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그 국어 선생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지 말아야 한다. 까딱하면 여자 팬티나 보이고 재미는 있지만 다 부질없는 재미이다.'라고 했다. 아무 반문도 하지 않았다. 괜히 문제를 일으키기 싫었고, 반문한다고 해서 선생을 공개적으로 망신주는 효과만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끝 작렬하는 한국인의 특성에 맞게 그 선생의 추잡하고 자잘한 복수에 분쇄되었을 것이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았을 뿐, 내 머릿속에는 이미 격렬한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선생님 여자 팬티 보이는 게 나쁜 건가요?', '재미없는 것보다 재밌는 게 나은 거 아닌가요?', '선생님도 예전에 은하철도 999 재미있게 보셨다면서요. 그것도 일본 애니메이션이랍니다.' 등의 나름 합리적인 내용이 떠올랐다. 


 선생의 그런 일본애니메에 대한 질타가 나에게 반발을 일으킨 것은 결정적으로 일반화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은근 팬티를 보이는 판치라 애니나 아예 대놓고 성인용 애니메인 헨타이의 장르도 있지만, 세계 명작 만화라고 붙여진 것들은 기대 이상의 문학적 가치와 감성이 풍부하게 녹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말처럼 다른 것들을 일반화하자면 소설도 거의 남녀 간의 사랑을 전제로 한 것들은 다 야설이며, 그래서 소설은 나쁜 것이 된다. 선생 자체는 어떤가? 은근히 촌지 받아 학생 차별하는 선생, 그 날 기분에 따라 괜히 책 잡아서 학생 후드러패는 선생도 있다. 그러므로 선생들은 모두 다 부패 폭력 교사다. 라는 것도 성립한다. 


 왜 이런 말들이 그것도 몇 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다시 생각나는지 궁금했다. 그저 내가 오타쿠 지망생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옛 기억에 취해 받아든 DVD가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일수도 있다. 그 재미란 전두엽이나 후두엽이 아닌 뇌 속 깊은 곳의 소뇌와 연수를 건드리는 감정적인 재미이기에 더욱 재밌다. 


 한국의 아청법에 어울리지 않는 양산형 오타쿠들도 오타쿠이며, 나 같은 골수 골동품 오타쿠들도 오타쿠이다. 무언가 하나에 빠져 그것에 대해 탐구하고 탐미하는 것은 결코 범죄나 혐오의 대상으로 볼 수 없다. 다만 그것을 그렇게 보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다. 애니가 아닌 공부 오타쿠라면 어떨까? 공부에 대해 탐구하고 탐미하는 정신병자는 결코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아니며, 혐오의 대상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왜 대상이 애니메가 되는 순간 오타쿠와 연결될까? 그것은 잘못 알려진 일본애니메이션의 이미지와 연관이 있다. 아니 정확히는 일본 오타쿠의 전형적인 모습에 대한 거부감일 수도 있다. 배바지에 로리 캐릭터가 그려진 셔츠를 바지 속에 넣어 입고 백팩을 맨 체로 한 손에는 언제나 브로마이드나 DVD 혹은 피규어가 들었을 법한 쇼핑백을 들고 있다. 안경은 기본이고 모자는 옵션이다. 대부분 머리가 길고 뚱뚱하다. 이런 식의 이미지화는 굳이 애니를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있으며, 그래서 애니를 좋아하는 사람은 다 그런 식 일 것이라는 선입견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부당함에는 선입견과 일반화가 존재한다. 그 선입견에 일본 애니 오타쿠가 음침하고 변태스러우며 못생긴 사람으로 일반화 돼 있는 것은 참을 수 있다. 실제로 나라는 사람이 그렇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무턱대고 애니를 본다는 이유만으로 원래는 혹은 앞으로 그렇게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야말로 나치 시절 인종만 가지고 대량 학살을 자인했던 히틀러나 북괴의 김일성처럼 이념이라는 실체 없는 것으로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수천의 사람을 학살했으며, 수천만의 사람을 기근에 시달리게 하는 덜떨어진 사상가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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