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 60분 - 통한의 102분, 세월호 침몰추적 60분 - 통한의 102분, 세월호 침몰

Posted at 2014. 4. 21. 21:31 | Posted in 리뷰/TV

 요 며칠 꾸준히 하던 블로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그 충격이 그저 사고가 났다. 사람이 죽었다는 어쩌면 상투적일지 모르는 현상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 속에 있는 분노와 회의와 냉정은 뇌가 흔들리는 듯한 충격과 혼란을 주었다. 그래도 일단 제일 중요한 것은 배 안에 갇혀있을 수도 있는 희생자이기에 혼란에 대한 처방보다는 조용히 지켜보며, 혼란을 주지 않는 것이 제3자로서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추적 60분도 부외자의 입장에서 세월호 침몰을 조명했다.



 추적 60분 통한의 102분이라는 제목의 뜻은 배가 가라앉은 데 드는 시간이 102분이라는 소리였다. 즉 탈출 가능한 시간이 102분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반의 승객들은 탈출하지 못했다. 통한. (痛恨) 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선박사고 소식에 가장 놀란 사람들은 안산 단원 고등학교와 수학여행에 참가한 학생들의 학부형일 것이다. 






 학부모와의 마지막일지 모르는 카톡 대화는 걱정하지 말라며, 구조를 장담하고 있었다.




 배가 기울어져 가고 있다는 자식의 전화를 받은 부모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




 

 어떤 사건이든 참사에 의한 사건의 맥락은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 사고라는 것과 사건이 일어난 후인 구조라는 것이다. 사고의 경우는 배의 노후와 선장과 대부분 선원의 부적절한 행동이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조는 어떨까? 해경 구조 현황의 첫 소식은 단원고 학생 324명의 전원 무사 구조였다. 구조 중에는 '무사'나 '완료'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단원고 학생 324명 무사 구조 중? 이었을까? 


 목숨 바쳐 사람의 안전을 도모하는 해경이나 119구조대원 분들은 항상 감사하다. 그런데 구조하지도 않은 혹은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을 퍼트려 학부모의 마음에 화상을 입힌 이번 해경의 행동을 보며 많은 실망감이 들었다. 전원구출 정보의 원출처는 어디일까? 해경일까? 안전행정부일까? 알고 싶지 않지만, 이 모든 상황이 종료되면 가슴에 자식을 묻은 학부모들은 알고 싶어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민간에서 구조능력이 있는 분들도 초반의 전원구조 소식을 듣고 출동을 안 했다고 한다. 즉, 이 소식을 전한 사람은 구조의 골든 타임을 모조리 허공에 날리는 간접 살인죄가 있다고 봐도 상관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집에 불이 나서 소방차를 부른다. 소방관이 묻는다. "집에 사람 있나요?" 여기서 불순한 목적이든, 정말 몰랐든 "아뇨 없어요."라고 했는데 진화 후 사체가 발견된다면 어떤가? 그리고 그 사체가 당신의 자식이라면 어떨까? 나 같으면 안에 사람 없다고 한 증언자에게 형법을 위반하는 수단으로 응징을 가할 것이다. 



 이상 징후가 발생한 뒤 약 30분경과 배가 거의 반 정도 뒤집혔다. 








 지금 화면은 사고 발생 초기이다. 그런데 보이는 인원이 적다. 다들 객실 안에 있었다. 



 그 와중에 나이가 어린 아기도 구출된다. 응애 거리는 갓난아기는 아니지만, 약 4~5살 정도 되는 여아로 기억한다. 이 여자아이를 보며 난 한 가지 중요한 명제를 다시금 되새겼다. "신은 없다."



 앞서 말한 전원 구조 소식이 오보로 판명 나며, 바로 학부모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사고 난 자체로 아마 불안의 극을 달리고 있었을 사람들에게 전원 구조가 거짓말이며, 당신의 자식이 저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익사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한 것이다. 기자들은 옳다구나 이번 주 기삿거리 걱정은 없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화가 난 부모들의 곁에는 항상 카메라가 멈추지 않았다. 



 배의 이상 징후 발생 102분 후 선미 쪽 약간의 구조물을 제외한 배 대부분이 물에 잠겼다. 이 시점에 언론들이 항상 하는 말이 있었다. 바로 '에어포켓' 배가 뒤집힌 상태에서 침몰했다면 배 안의 차단된 곳은 공기가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에어포켓 덕택에 살아남은 해외 사례도 있다고 한다. 그렇게 약 4일의 희망고문은 시작된다. 


 에어포켓이 존재하며, 실제로 거기에 사람들이 생존하면 무엇하는가? 그것을 발견, 구조하는 것이 병행되어야만 소용 있는 것이다. 실제 현장에서 민,관,군의 잠수부들이 얼마나 많은 각오와 고생을 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결과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에어포켓에서 살아있는 사람들? 언론은 결국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런 식의 생존을 할 수 있다며, '구할지 말지는 모르겠고, 일단 너희가 좋아하는 생존자 신드롬으로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자위나 하렴?' 이라는 생각을 했던 걸까? 


 너무도 가난하여 배고픈 사람이 있다. 그 사람에게 결코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가져도 되는 엄청난 돈이 있다고 알려주자. 어떤 방법을 써도 그 돈을 가질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돈은 실재한다고 가정하자. 아마 가난한 사람은 그 돈이 있는 곳에서 말라죽을 것이다. 실효 없는 희망고문은 굉장히 무서운 것이다. 시청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싶은 방송인들에게는 오열하며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라는 자식 앞세우는 사람들이 신경 쓰이지 않은 모양이다. 신경 썻다고? 나도 언론인들의 자식이 떼로 죽어서 지금의 언론인이 주는 관심이라는 것을 보이고 싶다. 아마 그러면 언론인은 나를 때리겠지? 능멸하지 말라며.




 실제 17일 자정의 팽목항을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티비 개인방송을 통해 18일 정도의 팽목항 상황을 봤다. 그곳은 슬픔과 한탄과 후회로 가득 찬 세상이었다. 아마 요즘 대한민국에서 제일 슬픈 곳은 팽목항 아닐까?




 사고가 터지고 거의 유일한 이슈가 되어버린 세월호 침몰 사건에는 몇 가지 우리 사회의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여러 청사진 중 허위사실유포도 포함된다. 각종 SNS와 카카오톡에 실종자들의 전언이 왔었다거나 구조대들이 포기 상태라는 확인되지 않은 소식들은 피해자 가족들을 두 번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누군가의 비극으로 자신을 알리며, 유명세를 타고 싶은 제물로 생각되는 시대는 근본적인 인간성마저 함락되었다. 






 바닷속 날씨는 바깥의 2개월 전이라고 한다. 즉 지금이 4월이니 2월 날씨라는 것이다. 희생자들의 고통은 상상할 수 없다.



구조대의 헌신에 대해 반문하지 않겠다. 그들도 사람이고 사건 현장을 제일 가까이서 접하는 사람으로 육체적 피로는 물론 정신적 피로가 말도 못할 것이다. 그런 구조대와는 별개로 구조대의 지휘 계통에 대한 신뢰는 석연치 않다. 실제로 피해자 가족들의 진술을 보면 사건 발생 초기에는 현재와 같은 많은 인력과 장비가 투입되지 않았었고, 활동하고 있는 구조마저 눈에 띄진 않았다고 한다. 물론 물속 상황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더군다나 그들은 아이를 잃은 부모다. 이에 대한 구조 지휘 계통의 관리 미숙이 이런 사태를 키웠다고 생각한다. 







 부모를 잃은 자식은 '고아'라고 불리고 남편을 잃은 부인은 '과부'라고 불리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에겐 어떤 호칭도 없다. 그 슬픔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까? 


 자식을 잃은 슬픔은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지며, 으깨지는 듯한 고통에 비유한다. 지금 팽목항에서는 약 200여 명의 부모가 그런 고통을 견디고 있다. 




 1분 1초가 시급한 현장에 사망자가 나올 때마다 시간에 대한 원망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전화로 마지막 목소리를 듣고, 믿기지 않는 현실에 카톡을 보내보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아 나타나는 숫자1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제 숫자가 사라질 날이 올까? 제발 다시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아이들과 함께 침몰한 배에 있었던 선생님은 끝까지 아이들을 탈출시키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귀감이 되는 이런 선생다운 선생도 결국 참혹한 인재에 희생되었다. 







 어려운 상황과 비극적인 일에 항상 등장하는 것은 훈훈하고 안타까운 미담이다. 


 어떤 학생은 친구가 바다에 뛰어드는 것을 무서워하자 자신의 구명조끼를 건네준다. 그리고 구명조끼가 없는 학생은 바다에 휩쓸려 희생된다. 친구를 구한 소년, 그를 영웅으로 포장하며, 언론은 조건 없는 시청자들의 멘붕을 막아준다. 하지만 한풀 벗겨보면 결국 한 명의 학생이 희생된 것이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하는 말로 '자기가 살지, 왜 친구를 줘서.'라는 말이 증거이다. 자신을 희생해서 누구를 구했다가 본질이 아닌, 한 학생이 바다에 빠져 희생됐다가 본질이다. 





 침몰한 세월호는 점점 바다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가라앉을수록 부력은 상실되며, 확인되지 않은 에어포켓의 존재도 불투명해진다. 이 방송이 나가고 몇 시간 후 배는 완전히 수면 위에서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 또 몇 시간 후 배가 뒤집힌 채로 바닥에 넘어졌다고 한다. 에어포켓의 경우, 배의 각도가 틀어지거나 큰 충격이 가해질 경우 붕괴할 것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순신의 명량해전으로 유명한 울돌목을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조류가 빠르다는 곳이 맹골수도이다. 그리고 세월호가 침몰한 지점이기도 하다. 비극에 비극이 겹쳤다. 유속이 그나마 안정된 곳이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왜 배는 거기서 침몰해야 했을까? 유속을 인위적으로 늦출 수는 없었을까? 때 늦고 허무한 생각만이 가득 피어났다.






 생존자의 증언과 여러 매체에서도 보도했듯 세월호의 적재는 엉망이었다. 고박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배가 기움에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복원력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당연히 적재물들에 대한 꼼꼼한 결박이 필요하다.






 사고 현장을 보면 컨테이너들이 둥둥 떠다녔던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즉 배에서 적재물들이 제대로 고정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무게를 계산하기 힘든 컨테이너와 자동차는 배가 기운대로 밀려났을 것이다. 







 신고 접수 후 오전 9시 10분경에 해경이 출동하였다.



 오전 9시 30분에 해경이 현장에 도착하였다. 20분이 걸렸다. 



 속속들이 주위에 있던 어선들도 도착하여 구조에 힘을 보탰다. 개인적으로 이번 사고에서 초반 구조는 어선의 힘이 크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구조 어선에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지는 모르겠다. 현장까지 가는 기름값이나 주는지 궁금하다. 그저 인명은 재천이므로 국가는 그런 국민의 양심은 무료라고 생각해도 될까? 만약 어선들이 없었다면 해경이 출동해 있음에도 밖에 나와 있던 사람들을 온전히 다 살릴 수 있었을까? 





 이 사건에서 가장 눈물 나고 안타까운 대목이다. 학생들은 함내 방송에 따라 객실에 대기하였다고 한다. 침몰하는 배에서 객실에 가만히 있겠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가장 침수가 느린 배의 윗부분으로 이동하며, 구명조끼를 착용하는 것이 기본적인 대처방법이다. 


 함내 방송에는 계속 대기하라는 말만 나왔다고 한다. 학생들 생각으로는 이런 혼란 속에 자신들이 나가서 우왕좌왕하면 상황이 더 안 좋아질 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분명 승객들을 대기시켜 혼란을 최소화하는 것이 사고를 줄일 방법인 사고가 있다. 하지만 세월호의 경우는 분명히 아니었다. 


 심리학적으로 권위가 보장되는 사람의 말은 위급상황에서 절대적이라고 한다. 대구 지하철 참사도 마찬가지로 객실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침착하라는 방송을 듣고 가만히 앉아있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사회생활도 안 해본 학생들에게는 위기 상황에서 함내방송을 굳이 어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은 남들과 다른 개성 넘치는 것을 규제한다. 착한 아이들은 그 교육을 섭취한다. 줄 설 때에도 삐져나오지 않으며, 조회 시간에 발 장난도 치지 못하며, 책상 줄까지 맞춘다. 단체에 적응하는 훈련은 매우 세뇌적이다. 창의력을 따지지만 결국 우리나라 교육은 절대로 창의적이지 못하다. 개성적이지 못하고, 창의적이지 못한 사고는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보다는 친구들과 선생님의 행동에 동화하며, 함내 방송이라는 주입식 명령에 순응했다. 하지만 스스로 기지를 발휘하여 탈출하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은 학생들에게 0.0001%도 없다.


 선장이 탈출 명령을 내렸고, 이 명령이 전달되었어야 했다. 그게 정상이었다. 승무원들은 구명조끼를 나눠주며 승객들을 대피시키며, 구명보트를 펼쳐야 했다. 선장은 승객들이 다 대피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보트를 타야 했다. 하지만 선장은 이해 안되는 대기 명령을 내렸고, 자신이 제일 먼저 배를 빠져나왔다. 그에게 자식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자식도 그 배에 승객으로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까? 


 생명과 직결되는 직업이 몇 가지 있다. 직업윤리가 없다면 관련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국가적으로 관리를 해야 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자격을 심사하여 증을 배부하는 것이 아닌, 반복적이고 깊이 있는 관리가 필요하다.




 배가 넘어감에 따라 바닷물이 차올랐을 것이다. 이미 기운 배 안에서 이동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희생자에게 비극이 닥쳤을 것이다. 



 사고 당시 안내방송은 "현재 위치에서 절대 이동하지 마세요. 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면 더 위험해요."라고 했다. 단순 고장으로 배가 휘청하는 대에 대한 완벽한 안전 방송이다. 결코, 배가 침몰하는 데는 적합한 방송이 아니었다. 









 사고 선박의 선사인 청해진 해운에선 안전에 관련한 퇴선지침서가 있다고 했다. 선장이 퇴선결심을 하였을 때 비상방송을 한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었다. 법이 있어도 지키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이런 지침도 지키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청해진 해운 측에서 이런 지침이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제주 해상교통 관제센터에서는 승객에게 구명조끼를 착용시키고 퇴선준비를 하라고 했다. 





 선장은 여객이 다 내릴 때까지 배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선원법 2장 11조에도 불구하고 선장은 제일 빨리 탈출하였다. 선장이 법을 몰랐을 리는 없다. 살고 싶은 열망이 그만큼 강했을까? 생명의 높낮이는 없다. 하지만 60대 후반의 남자와 200여 명의 달하는 고등학생의 생명에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존재한다. 


 선장은 간접적 살인을 자행한 것이다. 그것도 너무 잔인한 방법으로 저질러 온 국민의 울분을 받고 있다. 하지만 결국 저 사람은 울분에 합당한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항상 그랬듯 피해자의 피해보다 가해자의 인권을 챙겨왔고 법 또한 냉철한 쿨뽕에 의해 객관적인 사고만을 하는 것이 맞으므로 감정적인 국민들의 울분에 맞는 구형을 한 적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아예 무죄를 받고 나왔으면 한다. 어차피 법으로는 적절한 심판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와 온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매일 매일 혼란과 두려움에 떨며 살게 하고 싶다. 하지만 아마 그는 삼시 세끼 국민의 혈세를 축낼 것이다.







 선장뿐만 아니라 선원들에게도 책임은 있다. 



 비상시에 선원들은 승객들을 대피시켜야 하는 것은 의리나 인의가 아니다. 의무이다. 하지만 위급상황 때문에 그런 생각을 못 했다고 변명을 했다. 기가 막히고 짜증이 났다. 물론 목숨은 귀하며, 사람의 살고자 하는 의지는 강하다. 그 의지로 앞 뒤 가리지 않고 탈출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 탈출로 여러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다면 그 탈출은 범죄이다. 



 사고 당시 현장 폰카에서 갑판으로 나온 승객이 객실 쪽 물이 들어오는 장면은 억장이 무너진다.




 함내 방송을 무시하고 아수라장 상태에서 빨리 나가야겠다는 본능적인 사고를 한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배에는 사용하지 않은 구명정이 여러 척 배치되어 침몰하고 있었다. 배에서 사용된 구명정은 단 두 척이라고 한다. 만약 구명정을 다 펼쳤으면 타고 있던 승객을 모두 태우고도 남는다고 한다. 


 선장은 뭐가 무서웠을까? 타이타닉처럼 구명보트가 부족한 것도 아니며, 대서양의 한가운데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인터뷰한 선원에게 반감이 들었다. 선원의 별다른 수고 없이 구명정을 펼칠 수 있었음에도 그냥 도망왔으며, 그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선원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으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배가 사고를 당하고 승객들에게 전원 구명조끼가 지급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멀찍이 구명조끼가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구명조끼가 멀리있는 하나의 방에 배치된 것은 아마 객실 내 인테리어나 불필요한 분실을 막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니까 보기 좋기 위해 혹은 쓸데없는 낭비를 줄이기 위해 승객들의 안전을 하나의 방안에 가둬버린 것이다. 




 구명조끼가 다 지급되었더라도 결국 대기방송으로 많은 사람은 객실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빠져나와 바다에 뛰어들고 구명조끼가 없어 바다에 휩쓸린 사람은 살았을 것이다. 이 또한 선박회사와 선원들 그리고 안전검증 기관의 잘못일 것이다. 더불어 그렇게 안전 검증을 하더라도 사고가 없어서 괜찮다고 생각하며 별다른 제스쳐 취하지 않은 국민들 그리고 그 국민에 속한 나 또한 잘못일 것이다. 우리 모두의 안전불감증이 결국 그 아이들을 죽인 것이다.







 해군, 해경들은 구조 작업에 대해 묵묵부답이었다. 참담하고 힘든 것 잘 안다. 하지만 저런 행동 하나하나가 결국 피해자 가족에게는 큰 데미지일 것이다. 



 보이지도 않고 확인도 안 되고 아무것도 진전이 없는 상황에 아버지의 눈물이 애달프다. 



 가족들은 분노와 침착을 번갈아가며 버티고 있었다. 큰 소란도 있었고 애달픈 통곡 소리만 체육관과 항에 가득할 때도 있었다. 아이들을 찾아달라며, 아이들의 시신이라도 찾게 해달라며 울부짖는 그들에게 당국은 한없는 거짓으로 일축했다. 그 거짓은 생존자와 실종자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않음이고, 할 구조 작업을 마치 하고 있는 거처럼 말한 것이다.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의 아픔에 유통기한은 없을 것이다. 그 아픔에는 자식을 잃어버렸다는 큰 상실감과 더불어 성의 없는 늑장 대처를 보여준 구조 당국과 와서 사진이나 찍으려는 정치인들, 라면을 먹었던 정치인과 가족들을 속여 아픔을 두 배로 만든 사기꾼, 구호품을 훔친 사람들, 갖가지 오보를 쏟아내며 가족들의 심장을 쥐어짰던 언론이 만든 아픔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사고 일 수가 지날수록 약해지는 생존 가능성에 전 국민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얻는 것 같다. 그래도 단 한 명이라도 살아 돌아와 줬으면 한다. 어떤 방법이든, 어떤 형태든 살아만 줬으면 한다. 더 이상의 비극이 없었으면 한다. 


//